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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의사의 세계일주 - 베트남편 (1)

출발

by 정신과 의사 Dr MCT

설레는 마음과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메고 집을 떠난 지도 벌써 2개월 반.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네팔을 거쳐 지금은 스리랑카에 8일째 머무르고 있다. 내 글을 딱히 기다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늘 브런치에 여행 후기를 남겨야 한다는 찝찝한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었다.


첫 글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그 시작은 알량한 완벽주의에서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에 그가 여행기를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작성한다고 말한다. 기억이 한번 침전되고 나서야 다시 보았을 때 중요한 일들과 감정이 더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여행기는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 생각 그리고 여행의 기억이 뒤섞여 또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그처럼 한 달 정도 기다렸다가 첫 번째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다. 마치 나의 여행기가 자연스럽게 써지길 기다리는 듯이. 그러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언젠간 써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더 조급해졌다.


이상하게 중요한 일은 이렇게 미루면 미룰수록 더 무거워진다. 미뤘던 것만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자가 쌓이듯이 늘어나 점점 더 시작을 어렵게 만든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이제야 나의 첫 여행기를 적어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처럼 기대하거나, 걱정하거나, 기다려왔던 일은 실행하기 전까지가 가장 감정적으로 벅차오른다. 그러나 생각보다 막상 실행을 하면 별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뇌에서 상상할 때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해야 하지만, 실제로 맞닥뜨렸을 때는 '지금, 현재'의 문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첫 여행지, 베트남 사파에 가는 길도 그랬다. 김해공항에서 가족들과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온갖 감정이 올라왔다. 새로운 곳에 가는 설렘, 너무나 거대한 세계일주라는 목표에 대한 불안, 당장 계획이 없는 것에 대한 초조, 사랑하는 사람들과 당분간 보지 못하는 아쉬움, 오랜 시간 꿈만 꾼 일을 드디어 실행한다는 기쁨. 이 모든 순간이 베트남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디오의 볼륨을 줄인 듯이 줄어들었다. 밤 10시,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만이 남았다.

출발 전의 멀끔한 모습




베트남 안에서의 첫 여행지인 사파를 가기 위해서 밤 12시에 출발해서 새벽 6시에 사파에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생각보다 아늑해서 '이 정도면 꽤 돌아다닐 만 한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트남 이후로는 그렇게 편한 버스를 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사파는 걸어서 30분이면 시내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생각보다는 작은 동네였다. 고도가 1600미터 정도 되기에 여름임에도 아침에는 얇은 바람막이를 입어도 되는 꽤 시원한 날씨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뷰가 훌륭한 숙소의 테라스에서 사파의 명물, 모노레일 전차를 보자 정말로 모든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장난감 같은 모노레일

세계여행의 첫 숙소는 다른 요소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호텔 앞의 뷰가 좋아서 예약했다. 정말 멋진 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도미토리 룸의 환경을 잊게 할 정도는 안되었다. 내가 쓴 방은 8인 도미토리 룸이었는데,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이 냄새도 많이 났고 화장실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창문이 없어서 환기가 안 되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첫날 자자마자 '앞으로는 웬만하면 도미토리 룸에서는 안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싼 곳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겠지만.

앞으로 이런 곳이 나의 집이다


여태까지의 여행 중에 첫날이 가장 길었던 느낌이다. '뭘 해도 된다는 자유로움'이 오히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색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몸뚱이가 시키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잠이라는 임무만 빼면 어떤 숙제도, 의무도 없는 상황이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지금이야 빈 시간에도 이것저것 활동을 하며(주로 빈둥거린다) 지내지만 처음에는 그 자유로움이 부담스러웠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더니 '자유'와 '여유'도 누려본 사람이 잘 누리는 듯하다. 나는 늘 환자들에게 '여유를 가지고, 한발 물러서서 보세요'라고 얘기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내가 그것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실은 나도 잔뜩 긴장하고, 바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많은 것을 그만두고, 내려놓고, 물리적으로 3000km 이상 떨어진 곳에 가서야 깨달았다.



두 달간의 미룸 끝에 드디어 여행기를 출발하니 어찌어찌 또 글이 써진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끝에 도달하긴 했다. 내 세계일주도 사실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출발, 도착, 고난, 적응, 무료의 무한 반복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흘러가고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색하다. 마치 걷는 과정을 처음 배우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걷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생각하지 않아도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 온다. 아마 여행도, 글쓰기라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또 어디선가 눈을 뜨고, 또다시 처음처럼 어색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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