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생은 운으로 결정되는가?
1971년 8월 14일 스탠퍼드의 사회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는 한가지 사회 실험을 진행합니다. 이 실험은 일반적인 사람 24명으로 14일간 진행되도록 예정되었으나 6일만에 성적 학대와 고문 등의 가혹 행위로 중단되었습니다. 실험의 설계는 간단했습니다. 24명 중 일부는 죄수 역할을, 나머지는 교도관 역을 하도록 하여 각자의 역할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를 관찰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죄수나 교도관과 전혀 먼 사람들이지만 역할만 지정해줬을 뿐이었음에도 교도관들은 잔혹한 행동을 하기까지 6일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은 인간이 사회적인 계급 안에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실험은 후에 윤리적 문제, 조작 의문 등이 생겨서 그 결과를 완전히 신뢰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회자되는 이유가 실험의 설계가 워낙 흥미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디 에이트 쇼’는 위의 실험을 더 극단적인 상황으로 설계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할까를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드라마입니다. 웹툰 ‘머니 게임’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류준열, 박정민, 천우희, 박해준 등의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웹툰은 보지 않았지만 드라마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게 시청하였습니다. 한 시즌이 8화 밖에 되지 않고 1화의 러닝 타임이 50분 밖에 되지 않아 쉬는 날 하루만에 다 보았습니다. 그만큼 상당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디 에이트 쇼’의 구성, 캐릭터의 설정과 인물들의 행동양식이 흥미로웠습니다. 등장인물이 8명 밖에 나오지 않지만 다양한 인간 군상을 구체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짧은 시즌제 드라마의 한계로 캐릭터 서사에 빈 부분들이 다소 아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플롯이 워낙 재밌어 제 나름의 후기와 리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래 부터는 드라마의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어 드라마를 보지 않으신 분은 조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디 에이트 쇼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8인이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쇼에 참가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인이 시간에 따라 버는 돈은 처음 참가 할 때 어떤 층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1층을 선택하면 시간당 1만원, 2층은 2만원, 3층은 3만원으로 계산되어 마지막 층인 8층은 시간당 34만원을 벌게 됩니다. 차별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방의 크기도 다르고 식사와 물도 8층이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참가자 8인은 각자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8층의 여자는 히스테리적인 모습을 보이고, 6층은 반사회적인 모습, 2층은 정의로운 모습, 1층은 다리를 다친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주인공인 3층은 우유부단하지만 사회적 압력에는 결국 따르는 마치 현실 세계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8인은 처음에는 나름 정돈된 규칙을 유지하려 하지만 정해진 불평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억압과 군림, 배신과 쿠데타를 반복하다 결국 가장 약자인 1층이 사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3층인 주인공 입장에서는 나름 해피엔딩인 셈이지만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한명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이 진정한 해피엔딩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우리도 ‘디 에이트 쇼’처럼 운에 따라 위치가 정해집니다. 물론 드라마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보통 태어나는 환경부터 불평등합니다. 이 불평등은 꼭 경제적인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지리적 위치, 가정적 환경, 타고나는 재능, 신체적인 특징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물론 불평등의 존재가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각자의 노력에 따라 상황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으로도 극복이 되지 않는 장애물도 있고 노력을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은 그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성공= 실력 + 운
대성공=약간의 추가적 실력 + 상당한 운
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사회적 성공에는 운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디 에이트 쇼’는 노력이 아예 배제된 사회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끝은 사회적 약자가 사망하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이 결과는 필연적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주어진 시간을 다 사용했다면 그 악몽 같은 쇼를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중반까지는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더 버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고통을 더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이 따라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성공’만이 목표라면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성공’의 기준이 돈인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끝없는 경쟁에서 박차고 나갈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경제적 여유는 의미가 없으며, 자연인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식의 회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성공’만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게임에 집착적으로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공’의 기준을 사랑, 안정, 지혜, 자아 실현, 일상의 사소한 목표 등으로 돌릴 수 있다면 우리는 현실판 ‘디 에이트 쇼’에서 탈출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운으로 결정되는 사회는 불평등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회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글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디 에이트 쇼’를 통해 본 정의로운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