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수아 - 오 페드로소 19.2km
어제 너무 많이 걸은 덕분에 오늘은 상당히 수월할 예정이다. ‘오 페드로소’는 800km의 길고 긴 순례길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머물게 될 마을이었다. 난 최대한 늦게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급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20km 정도는 부담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발바닥이 두꺼워졌는지 웬만큼 험한 길이 아니라면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잠에서 깨보니 ‘떠버리’도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텅 빈 방 안의 이 적막함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나무의 키가 큰 것을 빼면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 이어졌다.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시작한 사람의 눈에는 이런 풍경들이 이국적이라고 느끼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됐다. 요 며칠 눈여겨보니 갈수록 Bar도 많아졌다. 그 안에 사람은 더 많아졌다. 아주 바글바글했다. 쉬어가려고 들어가 보면 앉을자리가 없었다. 특히 학생들이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상황이 더 심각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난 후의 한적한 길을 걸으려고 늦게 나왔는데 마음 같지 않은 현실이었다.
몇 군데의 Bar를 지나니 그나마 빈자리가 보이는 곳이 있어서 들어갔다. 맥주 한잔과 조그마한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벗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데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사리아에서 처음 본 한국인 여자 순례자와 필리핀계 영국인 여자 순례자였다. 길에서 만나면 늘 하는 대화를 우린 나누었다. 오늘은 모두 ‘오 페드로소’에 가는 걸 확인했다. 아마도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한국인 순례자는 서로 통성명을 하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이름을 ‘지니’라고 밝혔다. 난 ‘진희’로 알아들었는데 ‘지니’가 맞다고 했다. 영어식 이름이냐고 난 되물었는데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한글 이름이라고 했다. 내 머릿속에선 요술램프 지니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한 명은 ‘하이디’라고 했다. 이번엔 알프스 소녀가….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두 사람의 입은 정말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목소리도 컸다. 내가 본 외향형의 끝판왕이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했다.
부킹닷컴으로 예약한 알베르게는 원래 상가건물을 개조해서 운영 중인 것 같았다. 구조가 어색하고 특이했는데, 특히나 말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나눴다. 난 짐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내가 있는 알베르게 길 건너편에 있는 식당이 인터넷에 평가가 좋았다. 순례자 메뉴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트리아카스텔라에서 만난 볼리비아 친구 세르지오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꼬레아’를 외치더니 그대로 내 앞에 앉았다.
한국 드라마와 노래를 좋아하는 그는 내가 모르는 드라마 제목을 계속 이야기했다. 나도 모르는 한국에 대해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그가 신기했다. 볼리비아는 뭐가 유명하냐고 묻자 딱히 말해줄 게 없었는지 순간 멈칫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세르지오는 가장 먼저 우유니 소금사막이 있다고 이야기해 줬다. 아! 그게 볼리비아였어? 난 정말 몰랐다. 우유니는 알았지만,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물꼬가 트자, 세르지오는 자기 나라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일단 바다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볼리비아 평균고도가 3,500m라고 말하고는 축구선수 메시도 그곳에 오면 별 볼 일 없다며 웃었다.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며 만난 세 군데의 산 모두 1,400m 정도 되었는데, 그 정도는 볼리비아에 가면 지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또 한 가지 그 유명한 맥도날드가 없다고 했다. 그는 꼭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며 앞에 놓인 음식을 내려다봤다.
내일이면 순례길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동안 걸어오며 눈에 담았던 멋진 풍경과,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마음이 설레어서인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있던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알베르게 옥상에 올라갔다. 조용한 오 페드로소의 밤하늘엔 별이 한가득 빛나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내가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남들처럼 나도 과연 눈물이 날까?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