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일한 삶을 살아보자

by 윤수서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나보다 잘난 사람, 더 잘난 사람, 눈도 못 쳐다볼 만큼 잘난 사람들을 수두룩 뺵빽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 속에서 나의 존재는 정량적인 수치와는 별개로 한없이 작아지게 되는데, 그런 상황을 넋놓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내 자아가 손쓸 틈 없이 수축되어 결국엔 가방 한 켠에 처박혀 있는 꾸깃한 영수증 쪼가리에 불과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언젠가 당신도 그렇게 느낀 적이 한번쯤은 있지 않은가?


가족 관계에서는 존재 자체로 사랑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지만, 사회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에서 나를 평가하는 지표는 대표적으로 월급, 성과, 승진, 커리어, 직업의 등급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따라 내 자신이 평가받는 암암리의 카르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는 연봉 4천 5백에, 월세를 살고, 직급은 대리입니다. 작은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얼마짜리 인생을 사시는지요?"


나의 이상과 취향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이러한 문장으로, 불문율의 사회 등급인 C-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얼마짜리의, 몇 등급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등급을 올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부단히 해오고 있는가?"


불문율의 카르텔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아무도 나를 낮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평가절하하여 바짝 바닥에 엎드리게 된다. 이런 생각이 반복될 즈음부터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했다. 힘을 줘도, 힘을 뺴도 쇳소리 밖에 나오질 않았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면, 진단서에는 "심인성"이라고 적힌다.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몸이 경직되어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점점 "말을 아끼는 사람"에서 "말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누구처럼 높은 곳에 선다거나, 유명세를 가진다거나 하는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내 이름 석자 하나는 또렷하게 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도는 말하고 악수를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스물 여섯부터 목소리를 점점 잃어갔다. 직장 내 괴롭힘, 과로, 스트레스,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불면증, 가족간의 불화, 이별, 권고사직 등이 점점 나를 메마르게 했다. 그래서 내 목도 메마르다 못해 부러진 걸까.


경추 뼈가 골절되는 것만이 '목이 부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꺠달은 순간부터,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는 "심인성"으로 목이 부러진 나에게는, 그 망할 심인성 요인부터 제거하는 게 필요했다.


마침 정신의학과 선생님의 유튜브에서,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용서가 아닌 복수를 해야한다' 라는 말씀을 들었다.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문제 없는 복수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유일한 삶을 살아보자"


남을 따라하는 것도, 흉내내는 것도, 모방하는 것도, 부러워하는 것도 하지 말고. 내가 해낼 수 있는 내 삶을 꾸려보자고 무작정 생각했다. 더 이상 나를 낮추는 삶은 없을 것이다. 고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더 이상 스스로를 낮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국 애들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한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사고 말이야"


불현듯 이 말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박사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한국 사람은 그를 깎아내리는 심보가 내제되어 있는 반면 미국 사람은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는 생각부터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이 사실인지 어떠한지, 명확한 근거와 출처가 있는지는 상관 없다. 중요한 건 나도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지금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당신은 이 글을 쓰는 나의 거울 속 모습이 될 수 있고, 이 글을 읽는 불특정 다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건, 적어도 글을 쓰거나 읽기로 한 이 마음은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끌고 나갔으면 한다는 점이다.


뭐라도 해보자. 뭐라도 해내보자. 뭐라도 하나 완성해보자.


나도, 그리고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