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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Aug 28. 2024

스크린샷의 비밀

스크린샷은 미래를 끌어당기는 자의 기록이다.


아이폰 사진 앱에는 스크린샷 이미지만 모아 둔 폴더가 있다. 스크린샷(ScreenShot)은 스마트폰으로 조회한 화면을 언젠가 열어 볼 의도로 캡처해 둔 이미지로 내 스크린샷 폴더 안에는 무려 1,495장이나 되는 이미지가 있다. 최근 스마트폰 저장 용량이 꽉 찼다는 알림이 자꾸 뜨길래, 스크린샷 폴더에 칼을 꺼내 들고 각 사진에게 질문을 던젔다.


'내가 뭣(What) 때문에 이 화면을 캡처해 뒀지? 나중에 쓸모가 있는 이미지인가?'


대화기록, 실시간 교통정보, 맛집지도 등 '일시적 쓸모'를 위해 캡처한 이미지는 삭제 1순위다. 전자책을 캡처한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나중에 읽어보려고 무분별하게 캡처해 둔 이미지는 지웠다. 칼 든 김에, 읽고도 마음이 설레지 않는 전자책 이미지도 과감히 삭제했다. 마치 토너먼트라도 하듯 나를 덜 설레게 하는 문장은 삭제하고, 살면서 등대가 될 것 같은 가치 있는 문장들은 '좋아요'표시까지 해두며 살렸다. (아이폰에는 나중에 '좋아요'표시를 해둔 이미지만 따로 열어볼 수 있는 폴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덜어내는, 자그마한 미니멀라이프의 원칙이 스마트폰 메모리에도 적용됐다.


스크린샷 폴더가 가벼워질수록 질문은 많아졌다. 질문의 답인 'What'은 기억에서 튀어나와 이미지 꼬리에 말풍선처럼 따라붙었다. 과거 순으로 조회한 이미지는 어느새 3년 전에서 2년 전까지 거슬러 왔고, 저장된 이미지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앞둔 2022년의 나를 조우했다.


아이들과 호주 두 달 살기를 준비하던 2022년의 내가 캡처한 이미지였다. 가격이 자꾸 변동되는 항공권, 호주 현지의 다양한 스포츠 캠프, 누군가가 블로그에 강력하게 추천한 과자와 술, 가져가면 요긴하게 쓸 다이소 아이템, 아이들과 체험하면 좋을 프로그램 등 스크린샷 이미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설렘패키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Google Map에서 스포츠 캠프 소집 장소를 캡처해 둔 이미지를 봤을 때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당시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는 한국인은 물론 현지인의 후기가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주는 묘한 이끌림에 나는 아이들을 시드니대학 스포츠 캠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후기는 없지만 어쩐지 좋을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직감이 드는 순간 말이다. '내가 이 스포츠캠프의 후기를 처음으로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비장함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 됐다.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에서 만난 인연 덕분에 두 달 살기는 추억과 이야깃거리로 넘쳐났다. 그 덕에 <우리의 겨울이 호주의 여름을 만나면> 에세이가 탄생했음은 물론, 책과 블로그에 상세하게 담은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 후기는 많은 한국인들을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로 초대했다. (실제로 출판 후 호주에 재방문했을 때, 시드니대학 스포츠캠프에서 내 후기를 보고 등록한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사진으로만 찾아봤던 축구장에 아이를 바래다준 날, 영화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를 연상케 하는 초록의 잔디구장에 서 있는 아들을 보고 벅찼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또 다른 스크린샷에는 아이들이 캠프에 가 있는 동안 나를 위한 시간에 뭘 할까 고민했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미리 예약한 숙소 가까이에 필라테스 센터가 있는 것을 구글맵으로 발견하고 캡처해 뒀다. 타국에서 처음 배우게 될 필라테스는 아무리 비싸도 꼭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는데, 홈페이지를 보니 마침 6회에 $60 프로모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숙소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필라테스 센터의 위치를 구글맵으로 가늠하면서 설렜던 순간이 떠올랐다. 호주에 도착한 뒤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땀을 뻘뻘 흘리며 필라테스 등록을 마쳤을 때, 녹록지 않은 기구필라테스 수업에서 뻣뻣한 내 근육을 원망했을 때의 감정도 되살아 났다. 스크린샷은 현실이 됐다.


 

그 밖에 이어지는 스크린샷 이미지 속에도 가보지 않은 세계에 발을 들이기 전 설렘과 불안이 스며 있었다. 스크린샷 이미지의 대부분을 현실에서 만났다. 그 경이로움 때문일까? 이미지들 중 어느 것 하나 지우기 싫었다. 스크린샷 이미지들은 계획을 현실로 바꾼 증거들이었다. 어떻게 스크린샷 이미지 한 장이 그토록 많은 감정들을 퍼다 나를 수 있는 걸까? 하고 새삼 놀랐다. 부지런히 정보를 찾아 헤맸고, 예정된 장소에 있는 나를 시뮬레이션했다. 아빠도 없이 아이 둘과 호주에서 두 달을 보낸 사건은 내 인생에서 진도 8.0에 맞먹을 지각변동이었다. 내 한계를 시험했고, 나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그때만큼은 내가 펄떡이며 살아있었던 것 같다.


용량을 미처 덜어내지 못한 스마트폰을 끄고 잠시 생각했다. 스크린샷을 지우는 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스크린샷을 지우면 그 안에 스며있는 설렘도 함께 버리는 것 같았다. 설렘이란 감정은 과거를 향해서는 느낄 수 없다. 1분 뒤이건, 하루 뒤이건, 10년 뒤이건 마음이 미래를 향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성취하고 싶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렘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아닐까? 점심 메뉴가 고소하고 쫄깃한 치즈돈가스라는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일 때가 있는데, 쫄깃하고 환상적인 미래들을 많이 예비한 사람의 마음속은 늘 설렘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미래를 꿈꾸는 스크린샷이 가득하면 그만큼 설렘도 가득하지 않을까? 설렘이 현실이 되어 차곡차곡 쌓이는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지금의 나는 어떤가? 눈앞에 놓인 과제에만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설렘 가득한 미래를 상상하는데 시간을 좀 써 보는 건 어떨까? 하얗고 쾌적한 방 속 두툼한 나무 책상에 걸터앉아 루이보스 티를 마시는 나. 벽에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림이 걸려있고, 통창으로 보이는 파아란 숲을 힐긋거리며 글을 쓰고 독서를 하는 나. 훌쩍 자라 골드코스트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보내는 아들, 하와이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있는 아이들, 뉴질랜드 남섬 어딘가에 정박한 캠핑카를 등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나... 스크린샷 폴더에는 노을이 기가 막힌 뉴질랜드 캠핑장 사진과 하와이 스노클링 존, 서재 인테리어 이미지들로 가득할 것이다. 호주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랬듯, 더 자세히 더 실감 나게 상상할수록 내가 미래를 끌어당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더 많은 미래를 찾아 캡처해 둬야겠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나는 마치 삶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처럼 무릎을 탁 쳤다. 스크린샷이 품고 있는 비밀, 스크린샷은 미래를 끌어당기는 자의 기록이 아닐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할 때, 나는 그것이 이미 나의 것임을 알게 될 때까지 명상하고 이루어진 것처럼 상상하고 기도한다. 예를 들어 나는 눈을 감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집을 그려보면서, 이미 그 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꿈이 실현된 사실에 감사하며, 숨을 부드럽게 내쉰다. 그렇게 나는 수용을 들이마시고 감사를 내쉰다.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미 나의 것이 됐다는 완벽한 수용이다.
벤저민 하디 <퓨쳐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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