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도 먹다 보면 취한다고 한다. 눈앞에 허상처럼, 왔다 가버린 관계들처럼 달콤함에 취해버린다. 알면서도 취하고, 모른 척 취한다. 허허실실 웃다 보면 당장의 걱정은 덜 수 있다. 불 꺼진 집구석 한 켠으로 몸을 기댈 때까진 내가 짊어진 시간의 무게를 견뎌낼 위로가 된다. '오늘도 결국 버텼네'라고 위안할 좋은 거리가 된다.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삶이 수월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어렵다는 증거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그의 삶은 충만한 삶이지 않을까. 주변에 풀풀 풍기는 행동거지와 말본새 하나하나가 상대를 거절하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이들을 완벽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내 꼬락서니가 밉고, 또 역겹다.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면 아득히 남은 내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벌써부터 큰 한숨이 나온다.
가면을 쓰는 것이 일상이다. 싫어도 좋은 척, 그저 그래도 좋은 척, 좋으면 더 좋은 척.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해버리고야 만다. 그리고 후회가 밀려온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엎어 다짐하지만, 지키지 못할 다짐이 된다. 삶의 습벽이 되어버린 긍정이라는 압박감은 내가 누구인지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본전도 못 찾을 고민을 할 바에야 취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내가 누구인지 모르다가 죽어버리는 것이 속 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강물이 흐르다 보니 바다에 도착했듯, 인생도 흐르는 대로 놔두면 언젠가 어딘가에는 가 있을 것이다. 굳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이, 후회할 일말의 여지조차 없이.
휘적거려지는 생각들 너머로 또다시 싹이 튼다.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불신의 싹이다. '사람이 사람을 완벽하게 믿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머릿속을 관통한다. 내일은 가면을 쓰지 말자고, 접근을 허락하지 말자고 여러번 왼다. 분명 허술해지거나, 무너지거나, 후회할 걸 알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