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8.
커튼 사이로 불빛이 눈두덩을 두드리자 실눈으로 방안을 훑어봤다. 그 틈 사이로 분주한 종민 부자의 모습이 보여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인사를 건네니, 아저씨께서 '일어났어요?' 하시며 커튼을 열어젖히니 새하얀 햇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지난밤 큰 결정을 한 탓에 잠을 설칠까 걱정했었는데,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진 것인지 예상외로 너무나 푹 잔 지난밤이었다.
아저씨네는 짐 정리가 끝났는지 자리가 깨끗해 보였고, 특히 캐리어도 보이지 않아 여쭤보니 벌써 락커에 넣어두셨다고 하셨다. 지금 올라온 것도 혹시나 남은 물품이 있는지 확인 겸 혼자서 잠만 자고 있는 나도 확인 겸 겸사겸사 올라오셨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체크아웃 시간까지 겨우 삼사십 분 정도남짓.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한다고 샤워실로 가서 후다다닥 씻고서 어제 대충 챙겨둔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빠뜨린 게 없나 훑어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우리 방은 신기하게도 세 베드 모두 체크아웃이 오늘로 같았다. Mariano 베드는 짐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듣기로 어젯밤에 만났던 멤버들과 같이 다니기로 해서 일찌감치 방을 뺐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친구에게 미안함도 있으면서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었는데, 어제 자기 짐을 싸면서 무슨 길쭉한 상자를 계속 끼워 넣으려다가 안되더니 내게 선물이라며 줬는데 꺼내보니 유리로 된 와인잔이었다. 고맙긴 한데 뭔가 짬처리 당한 기분이랄까. 대충 나도 짐을 챙겨서 나서보기로 했다.
호주에 도착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양쪽 어깨에는 힙색과 노트북 가방을 멘 채로 한 손에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론 축구 선수들이 들고 다닐 스포츠 가방을 들고서 방을 나섰다. 시간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종민네 아저씨께서 마지막이니 점심 식사나 같이 하는 게 어떻냐고 말씀해 주셔서 냉큼 그러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챙겨 오신 것 중에 큼지막한 통에 든 요거트를 가리키며, "여기가 유제품 원산지라 그런지 요거트가 참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하셨는데, 그 말을 들어서인지 한 입 퍼서 먹어보니 정말 맛있었다. 이에 질세라 질 수 없단 생각에 나의 비장의 무기인 고추참치와 햇반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시더니 한사코 괜찮다며 나중에 챙겨 먹으라고 하셨는데, 그저 얻어먹기도 그렇고, 막상 짐을 싸보니 짐도 줄여야 하는 사정에 괜찮다고 함께 나눠 먹기로 했다.
이것저것 탁자에 꺼내며 식사 준비를 하는데 종민네 아저씨께서 조심스레 말씀을 해주셨다. 자기네도 저녁 비행기라 그때까지 돌아다닐 예정인데, 오후 일곱시 비행기에 따로 일정 없으면 같이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말이다. 제안은 너무 감사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팀과 남아야 하는 내 사정의 괴리감 거절해야겠다 생각하는데, 머리로는 '괜찮아요'라고 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아직 도착지 방도 못 구했는걸요'하고 푸념이 튀어나와 버렸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찰나, 종민 씨가 전제레인지를 돌린 햇반을 가져와서 식사에 돌입했다. 자취 최강 조합인 햇반+고추참치 덕분인지 '고추참치는 항상 옳다!'며 여자저차 식사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비행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으니 주변이라도 다녀올까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이 많은 짐을 다 들고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먼저 여쭤본 것도 아닌데 아저씨께서 백패커 뒤쪽에 물품 보관용 락커(Locker, 유료)가 있으니 돌아다닐 거면 락커에 두고 다녀오는 건 어떻냐고 말씀해 주셨다. 막상 락커를 보니 내 짐이 다 들어갈까 고민이 됐다. 함께 오신 아저씨는 사용 방법도 알려주시고 캐리어도 운동부 스포츠 가방도 번쩍번쩍 들어서 락커 안으로 척척 밀어 넣어주셨다. 더 넣을 것 없냐는 물음에 메고 있던 노트북 가방을 드리니 또 그 틈새로 살포시 집어넣어주셔서 힙색만 맨 한결 가벼운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짐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정말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사실 며칠, 그것도 스쳐 본 게 전부이고, 함께 일정을 소화했던 것도 아닌데도 숙소에서 마주쳤을 때마다 내 고민을 묵묵히 경청해 주신 종민네 아저씨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호주에 온 며칠 사이에 엉뚱한 사람도 많이 봤지만, 참 이런 것을 보면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일정이 있던 아저씨네 부자는 가야 해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부러우면서도 잊고 있었던 나의 막막함이 밀려왔다.
비행기 표는 예약했는데 잘 곳은 정하지 않았다. 거창한 말로 도전이니 주사위니 하고 썼지만 사실 너무 대책 없이 정한 즉흥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시드니에서의 마지막이란 생각도 있었지만, 생존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리는 것 같아서 곧장 백패커 소파에 앉아서 브리즈번 숙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막상 찾다 보니 시드니에서 방 찾을 때보다 더 수월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브리즈번 숙소도 완전 정착이 아니라 잠시 머물 곳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몇 군데 연락을 돌려보니 이상한 사람도 많았다. 먼저 일주일치를 송금하란 사람도 있었고, 광고에 적힌 가격과 전혀 다른 값을 부른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위안 삼을 건 브리즈번 시세가 시드니보다는 낮아서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겠단 생각에 고민도 덜 수 있었다. 단기 숙소를 구한다면서 욕심은 또 왜 그리 나던지, 찾다 보니 Gym에다가 수영장까지 딸린 아파트 셰어를 찾게 되었다. 한인 사이트여서 말도 잘 통하고 위치도 로마파크여서 교통도 꽤 좋아 보였다. 곧장 연락해 볼까 하고 연락처를 눌러보니 아까 문자로 문의했던 번호 중 하나였다. '몇 군데 더 하시나?' 하고서 연락해 보니 아까 물어본 곳은 꽉 찼지만 여긴 남아 있다며 공항 픽업은 구했냐고 물어보셨다. 대충 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차 싶어서 없다고 하니 아는 분을 소개해주겠다고 하셨다. 숙소에 픽업까지 구했으니 뭔가 마음이 놓였다. 아직 도착한 건 아니지만 생존이라는 단어가 희미해지고 나니 대신 마지막이란 단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밤은 분명 보냈는데, 이놈에 마지막이란 단어에는 뭔 놈에 힘이 있는지, 비행 전에 시드니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집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디든 가보자며 백패커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