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_Elements vol.5〈항해선을 위한 성도〉
*본 글은 Elements vol.5 〈항해선을 위한 성도〉에 게재한 글입니다.
서로의 충실한 리더(reader)
고집스럽게 시작한 미술사 공부로 삶을 꾸리기로 결단한 시기, 미술 생태계의 다종성과 다양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나는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찾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미술사 속의 ‘미술’과 현장에서 경험한 ‘미술’의 차이가 크게 다가왔으며, 이 둘의 괴리감 때문인지 당도하고 싶은 목표와 그것에 가닿을 방법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큐레이터’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을 여러 권 구매하여 그 실체를 더듬어 보려고도 했다. 여느 책들이 그렇듯이, 추상적인 내용을 가진 책도 다수 있었지만, 몇몇 책에는 좋은 선례들이 가득한 덕분에 조금의 갈피는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의 경험을 기술한 글의 행간을 읽어내기엔 나의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책은 방향타를 설정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참여하는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정표로 여겼다. 스스로 로드맵을 그릴 수 없었던 탓에 때마다 마주하는 것들을 길로 간주했던 것이다. 프로젝트 각각은 나의 기질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싶은 키워드를 만나 힘껏 미술에 빠져들 동력을 얻기도 했고 반대로 결이 맞지 않은 프로젝트를 미리 경험한 덕분에 부족한 점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보다도 나를 더욱 선명하게 해주었던 것은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동안에는 항시 기획자, 창작자, 리뷰어 등의 미술계 플레이어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진다. 전시장과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공간에 모여 안부를 물으며 오랜 시간 작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함께 쌓은 대화는 나 자신을 다시 회고하게 한다. 대화를 나누면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몰입했던 지점을 즐겁게 나누게 되고, 글로는 풀어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다시 각인하게 되는 것이다.
가벼운 대화를 통해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질까. 돌이켜보면 이들이 이전에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파트너 혹은 리뷰어였다면, 서로의 리듬과 에너지를 경험한 시간이 충실한 리더(reader)로 만들어 서로의 작업뿐 아니라 인간 혹은 예술인으로서의 결핍과 욕망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서로의 작업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그것이 글이든 이미지든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읽어주고 직면하기 어려웠던 문제들까지 세심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리더들은 방향타를 놓치기 쉬운 미술계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의 작업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시그널로 작용하여 두려움 없이 계속 발을 내딛게 했다.
겹치고 포개지는 신호들
의정부에서 임시로 전시 공간 ‘여튼952’을 운영했던 3개월의 시간은 가장 많은 시그널들을 감각했던 시간이었다. 여튼952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의정부에 거주하는 3명의 창작자와 1명의 기획자가 팀을 구성하여 오랫동안 방치된 주거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바꾸었던 공간이자 프로젝트의 명칭이다. 3개월의 시간 동안 여튼952가 시민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예술인들이 함께 교류할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 자문 등 다양한 성격을 가진 워크숍,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고요했던 이곳에 많은 것들이 생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계하기 위해 우리는 경제 활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간에 항상 머물러있었다. 한 팀으로 모이기 이전에는 서로의 작업을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작업을 공유하는 시간이 빈번해졌다. 장소와 자료를 특별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공간에서 식사, 청소 등 다분히 일상적인 행동을 함께하면서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에 잘 정리된 이미지와 글이 아닌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작업을 공유하면서 장표 사이의 생략된 서로의 시간을 읽었다.
더불어 전시에 참여하는 창작자들 또한 전시 준비를 위해 공간에 오랫동안 머물며 공간을 채워갈 전시와 프로그램들을 끊임없이 구상했다. 폐가의 지붕, 감나무 등 도심 속에서 보기 어려운 창밖의 풍경과 오래된 벽지들로 덮였던 회색 벽을 살피고, 응접실에 앉아서 다과를 나누며 창작자, 작업, 공간을 꿰어낼 방법을 함께 상상했다. 이처럼 공간에 머물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공간과 작업의 연결점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어떤 작업으로 이곳을 채울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는 지점이 발견되더라도 다른 생각을 긍정하고 지지하며 호흡을 맞춰나갔다. 함께 머물며 보낸 시간이 점점 쌓이니 여러 겹의 시간이 쌓였던 공간의 이전 모습처럼 우리의 사유들이 이곳에 겹겹이 포개졌던 것이다.
이들은 주거 공간으로 기능했던 공간 자체가 갖고 있었던 기억을 작업을 통해 불러내기를 시도하고, 창밖의 풍경이 불러일으킨 기억과 이전의 작업들이 겹치는 지점을 탐색했다. 하나의 기획 의도가 작업을 어설프게 해석하고 분류하고자 시도하지 않았으며, 전시를 설명하는 글은 군더더기 없이 지난 우리의 대화들을 담아냈다. 전시를 관람하는 시민들 또한 특별한 안내를 받지 않았음에도 창작자들이 처음 공간에 들어와서 주변을 관찰했던 것처럼 풍경과 공간 내부를 함께 살피며 작업을 감상했다. 전시를 위해 서로를 긍정하고 지지했던 시그널들이 전시장 곳곳에 스며들어 관람객의 시선에도 포개어진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고 가깝게
이러한 경험은 겹겹이 쌓여서 창작자와 리뷰어가 서로의 리더로 발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희미한 길을 혼자 걸어가지 않고 서로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동료의 존재가 미술을 계속할 수 있는 큰 동력으로 작동할 것을 믿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여튼952’를 운영하는 동안 창작자와 리뷰어의 언어가 미묘하게 다른 점을 발견하면서 둘을 수렴하고 실천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서로를 살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술공간 의식주에서 진행한 1:1 대화 프로그램 ‘오랫동안, 그리고 가깝게’에서부터 지역 내 예술인들과의 소모임, 교내의 실기와 이론 전공의 교류 모임에 이르기까지 창작자와 리뷰어가 안전하게 자신의 작업을 나눌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세심하게 기획하고 매개했다.
일례로 1:1 대화 프로그램 ‘오랫동안, 그리고 가깝게’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해당 프로그램은 가장 처음 창작자와 리뷰어를 매개하는 작업을 직접적으로 실험해 보았던 프로그램이다. 필자와 함께 대학원에 재학하는 동료 중에 미술계의 다양한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리뷰어를 섭외하고 이후 창작자를 모집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원활한 대화와 향후 연결 가능성을 고려하여 참여자의 포트폴리오를 사전에 모두 살피고 관심사 혹은 주요 이력 중 교집합이 있는 둘을 연결했다. 서로의 작업을 공유하는 대화로 채운 1시간을 통해 참여자들은 서로의 언어를 조율해 갔으며, ‘미술’이라는 교집합 하나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한 참여자는 여러 차례 공모, 네트워크 모임에 선정되지 않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학교 혹은 다른 기준으로 형성된 무리가 이미 존재하여서 미술계에 자신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다고 낙심한 마음을 나누었다. 함께 대화를 나누던 참여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민을 공유해 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일한 생각을 가졌었던 순간과 이를 어떻게 극복해 가고 있는지 담담히 나눴다. 당장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는 없지만, 동일한 호흡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모이기 마련이고 함께 작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멋진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서로에게 위로와 응원을 전했다. 각자가 마주한 상황은 다르지만, 같은 경험과 감정을 겪어냈고, 그리고 겪어내고 있기에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조금 떨어진 공간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프로그램의 정해진 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이야기를 한참 더 나누며, 서로에게 연결된 신호를 짙게 감지했다.
대화 프로그램 이후 그 신호들이 휘발되지 않고 나에게 그대로 스며들어 거주하는 지역의 예술계와 학교에서도 창작자와 리뷰어를 매개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참여한 이들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서로에게 집중하고 작업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향후 이어갈 작업의 동력을 얻고 자신 그리고 상대의 작업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신호들을 오랫동안 주고받았다.
촘촘히 한걸음씩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의 작업을 살폈던 충분한 시간과 과정은 이후의 전시, 연구, 비평 등의 결과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서로에 대한 탐색 시간 없이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작업을 알아가는 시간을 먼저 가진 이후에 적절한 기회로 함께 결과물을 내었기 때문이다. 상호 성장을 위해 날카로운 크리틱이 중요하게 작용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서로의 작업을 촘촘히 읽어주는 것이 서로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시그널이 작용하는 중요한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연결된 관계들은 종종 창작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고민과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한 시간을 기반 삼아 다음을 상상하는 동료로 남게 된다. 물론 개인의 역량을 충분히 쌓아야 하는 시간이 분명히 필요하므로 많은 시간을 자신에게 집중하는 작업은 창작자와 리뷰어 모두에게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창작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나와 내 작업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동료들의 존재가 중요하며, 세심하게 나를 읽어주는 행위가 내가 어디로 나가야 할지, 어떻게 단계들을 밟아가야 할지를 선명하게 한다.
창작자와 리뷰어를 매개하기 위해 기획했던 프로그램들 안에서 시그널들이 작용하여 서로를 매개하는 또 다른 기획으로 파생되는 걸 최근에 목도하고 있다. 정답이 되지는 않아도 이정표가 되어주기 위해 서로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탐구를 나 또한 지속해 나가려고 한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하기에.
Elements vol.5 〈항해선을 위한 성도〉
기획 및 편집: 퍼블릭퀘스천
서문: 박정서
디자인: 정다혜
Elements 소개
미시 세계는 미생물의 주도 아래 태곳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피고 지는 모든 생명을 매개하며 생태계의 순환을 돕고 있습니다. 미생물은 생명 사이를 연결하고, 돌보고, 흙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온 일생을 바치는 사려 깊은 지구의 동반자입니다. 생태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들의 활동은 우리에게 공공의 지혜를 전해줍니다. 퍼블릭퀘스천은 미시 세계에 담긴 공공적 의미를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연결하고, 확산해 나가고자 지난해부터 공공예술 프로젝트 《Careful Elements》를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Elements'는 본 프로젝트의 경계 없는 확산을 위해 마련된 연재 프로그램입니다. 미시 세계에서 발견한 12가지의 소주제로 동시대적 사회 테제에 접근하며, 다분야 연구자/창작자의 자유로운 관점을 공유합니다. Elements는 '포자(spore)'의 움직임을 따릅니다. 미생물의 한 종류인 균류의 포자처럼 허공을 떠돌며 증식하기 적합한 따뜻하고 축축한 곳에 사유의 뿌리를 내립니다. 이곳에서 살포된 창작의 포자가 사회와 생명 사이를 매개하며 공동의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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