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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경지 Mar 13. 2024

흐리고 부서진 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글_상업화랑 용산/김연홍/Tail on Tail/24.1.31-2.23

휙! 툭! 무언가가 돌아다닌다. 정확한 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계속 움직이는데, 그것은 가고 머무르고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부지런한 움직임 속에서 종종 뚜렷한 자취를 남기기도 한다. 불현듯 나무의 줄기, 물의 표면 등 익숙한 형체가 보일 때면, 그것이 불러오는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휘말려 움직임의 정체는 미궁에 빠진다. 이렇게 남겨진 혹은 남긴 흔적들은 구부러지거나 뭉그러진 형태로 화면에 계속 머물러있지만, 이와 조응하는 다른 형태들과 엮어서 다시금 살펴보면 겹겹이 쌓인 기억의 층위 중 하나를 꺼내게 한다. 어느 감각으로도 잡히지 않는 그 움직임. 형태를 파악했다고 확신하면 이내 도망가 버리는 꼬리같은 선들은 작가의 감각에 따라 그어져 획 그자체로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그 선들이 스며들고 퍼지며 선에서 면으로 몸바꿈을 한다.      


쉽사리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형태들에 작가의 감정과 사유를 가득히 담아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김연홍은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작업과 연결되는 《여름 해변가》 연작을 선보이면서도 결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진 이미지에서 비롯된 요소로 추측되는 형태와 그 위를 마음껏 가로지르는 선과 비정형의 형태를 교차하게 했다. 그렇게 붓터치가 도상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고, 다른 색을 이끌고, 스며드는 과정 자체가 형식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유영하는 선〉은 화면을 가득히 채운 일렁이는 물결과 하단에 심어진 갈색 붓터치들, 이어서 채운 노을, 햇빛, 그리고 보는 이의 시선을 당기는 불특정한 선과 형태가 함께 구성된다. 느닷없이 개입된 색과 선은 얽혀들어 가며 스며들고, 흩뿌려진 점들은 모두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듯하다.     


작가는 화면에서 형태의 경계선이 부서지며 물감이 유동적이고 우연하게 혼합되는 과정을 다양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여기에서 물을 가득 먹은 캔버스와 동양화 붓은 물감이 자율성을 확보하게 한다. 한 벽면을 채우는 〈잠시 머무르는 동안 Ⅱ〉은 마치 바다 너머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 렌즈에 새의 날갯짓이 포착된 장면과 같이 순간적인 움직임이 머무른 듯하다. 얇게 발린 색면 위로 이에 반응하는 색을 지닌 물감이 덮인다. 어떤 색의 물감은 배경에 스며들어 번지거나 붓에서 떨어져나와 화면을 구성하는 다른 색들과 조응하며, 중앙 부분에서 시선을 끄는 붓터치 흔적은 서로 스며들고 뒤섞이는 순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물감만큼이나 화면을 맴돌았던 관객의 시선은 〈여기로〉로 눈을 돌렸을 때 같은 방향을 취하게 된다. 양측으로 장막이 걷히며 새로운 풍경에 시선을 둘 것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로 펼쳐지는 풍경은 잎을 이루는 녹색과 연한 노란색의 빛이 얽히고 부분적으로 분홍과 남색이 개입하여 색채의 운동감이 가득한 양측면에 시선을 다시 뺏긴다. 서로 허무는 선과 색채는 이 사이로 무언가가 급하게 지나가며 일으킨 듯한 흔들림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작가가 화면에 남긴 가시적 또는 비가시적 요소의 흔적은 더욱 선명해져서 〈푸른 물 위에 닿은 꼬리〉에서와 같이 파동을 넘어서 휘돌아 흐르는 물을 화면에 구성한다. 과감히 칠해진 붓터치는 넓은 면적과 진한 색채로 원근감을 부여하기도 하며, 특히 높은 지대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듯한 시점은 꼬리처럼 길게 뻗은 선이 물에 닿자마자 휘감기는 순간을 목격하게 한다. 작가의 직접적인 붓터치 혹은 이로부터 캔버스 위로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맞닿은 꼬리와 물의 표면은 그 주변의 물결이 일렁이듯 흩뿌려진 점들과 서로 얽히고설킨 또 다른 꼬리들의 흔들림으로 옅은 색채와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화면 한쪽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시장을 나서기 전 벽면을 채우는 〈시린 표면 위를 쓸어내리는 선〉은 예측할 수 있는 형태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는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불쑥 올라오고 위에서 늘어진 선들이다. 앞서 언급한 작업과는 다르게 선과 선이 섞이는 형태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기존의 선을 휘돌아 감아서 비교적 세밀하게 덧대기도 하고 출발점을 알 수 없는 선들이 가장자리에서 솟아 나오며 섞이기도 한다. 이는 사진 이미지 속 감정을 회화로 복원하는 일에 천착해 왔던 작가의 이전 작업의 흐름과 유사하게 처음의 붓터치에 호응하는 색과 선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고 떠오른 기억이 가져오는 불특정한 감정을 화면에 표현한다.      

작가는 무엇에 닿고 싶었을까. 잔잔한 물결에 유영하며 물에 비친 것을 기존의 색과 형태와 함께 묘사하고, 잠시 머무르며 순간의 장면을 간직하고, 꼬리에 꼬리를 달아가는 붓터치로 서로의 결을 찾아가는 시도, 물감이 스며들고 흘러가듯이 자신이 기꺼이 끌어안고 유연해질 수 있는 태도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작업을 다시금 살펴보며, 날 세웠던 말을 지워내고, 굳어진 표정을 겹쳐보고, 높게 세웠던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그녀의 말마따나 “보송한 채로, 까슬거리는 채로, 다채로운 빛깔과 형질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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