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광기는 동의어가 아니다
뮤지컬 <광염소나타>와 영화 <위플래쉬>
연극 <아마데우스>에는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욕망을 주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예술만큼 가지지 못한 재능이 가슴 아플 정도로 선명히 다가오는 분야가 또 있을까요. 기독교에서 재능을 '달란트'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은 재능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는 모양입니다.
광염소나타를 보며 저는 데미안 셔젤의 영화 <위플래쉬>를 떠올렸습니다. 둘 모두 고압적인 교수가 나오고, 제자를 예술을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파멸로 이끈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떠올렸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플래쳐는 위대한 미치광이 스승 대우를 받으며 광기와도 같은 열정을 이끌어낸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지만, 저는 그가 본질적으로 단 한번도 스승이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K교수처럼요. 그건 가르침이 아니며 스승의 역할이 아닙니다. 예술계에 만연한 '엄격한 스승'의 모습이지만, 그건 가르침과 배움이 아니라 사람을 오렌지처럼 쥐어짜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위플래쉬>의 플래쳐는 이전에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를 압박한 끝에 자살로 이끌었고, 광염소나타의 K교수는 자신의 명예를 위한 새 곡을 만들도록 제자의 죄를 부추겼습니다. 만일 스승의 날에 최고와 최악의 스승을 뽑는 대회가 열린다면 둘은 '세계 최악의 선생님' 후보에 어깨를 나란히 할 것입니다. 그 전에 감옥에 가지 않는다면.
극에는 단 세 인물만이 등장합니다. 천재 S, 그를 흠모하는 동시에 지독히 질투하는 범재 J, 다른 이의 재능을 갈취해 명성을 만든 둔재 K 교수. 이 글에서는 S와 J, 두 인물을 중심으로 감상을 정리합니다. 저는 3월 17일 밤 공연과 3월 18일 낮 공연을 보았는데, 글에서 차이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1. S에 대하여
S는 아주 처음 등장할 때부터 금요일의 S와는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금요일의 S는 K를 향한 분노에 집중한 것처럼 보였는데, 토요일의 S는 초반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화가 보였습니다. 일기장을 툭툭 던지거나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것은 J에 향한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이 꼴이 되기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 보였습니다.
S는 분노할 때 악을 쓰지 않고, 무척 어른스럽게 보였습니다. 이미 부당한 일을 여러번 당하여 약간은 포기하고 지친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조금 무력해보이기까지 했는데, 내면에 표출되지 못한 분노가 조금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엿볼 수 있었던 장면은 교수를 찌르려는 것처럼 칼을 들었다가 그를 묶은 줄을 잘라낸 장면이었는데, 금요일의 S가 단번에-무척 단호하게 끈만 잘라낸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토요일의 S는 세번이나 칼을 들어 휘둘렀습니다. 끈을 잘라내기까지 세 번의 칼질, 그는 교수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과 그것으로 도대체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마음이 여러 복잡한 심경과 뒤섞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K교수가 떠난 뒤 닫힌 문 앞에서 혼자 분노를 아주 짧게 토해내는 모습이 무척 익숙해보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분노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저는 S가 후반에 악마 독백이 나오기 직전 J가 앉아있던 것과 같은 포즈와 위치로 피아노 앞에 주저앉아 있던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둘은 사실상 단 한번도 서로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적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S가 J에게 찔렸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뚝 서 있다가 '얼음, 땡!'하는 신호를 받은 것처럼 넘어져선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 좋았습니다. 금요일의 S는 그러지 않았는데, 토요일의 S는 뒷모습에서조차 배신 당한 사람이 아주 찰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친구가 자신을 해칠 거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건 금요일의 S가 가진 생각이기도 했지만, 토요일의 S는 비명을 지름으로서 고통을 토해냈지요.
그건 결국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잘라내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비명이었습니다. 분노보다는 경악과 슬픔에 가까웠습니다. '브루투스, 너마저!'가 생각났어요.
금요일의 S는 J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토요일의 둘은 서로를 사랑하나 그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정의내리기를 회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J가 S와 S에 대한 감정을 선율로 비유하고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다면 S의 진심은 내 하나뿐인 사람.에서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전 '내 하나뿐인 사랑.'으로 듣고 그만 눈이 튀어나올 뻔했는데 같이 본 친구가 원래 배우님께서 고의적으로 '사람, 사랑.'을 부드럽게 뭉개 연기하신다고 들어서 감탄했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우정도 사랑의 한 스펙트럼이거든요.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2. J에 대하여
J는 초반부터 아주 초조하고 불안해보였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불안하게 걷는 걸음 탓에 자신에 대한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한 인물처럼 보였고, 특히 토요일의 J는 금요일의 J의 광기와 다른 노선을 따랐습니다.
금요일의 J는 첫 살인부터 이후까지 자포자기했고 자학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더 극적이고 험난한 상황에 몰아넣으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자멸적인 쾌감이 그를 기쁘게도 만들고 괴롭게도 만들어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광기로 몰아넣을 수록 이전의 죄의 무게를 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그 죄가 결코 가벼워지지 않고 스스로도 이를 알아 K교수가 죄에 대해 다그치는 순간 그것을 깨달았지요.
반면 토요일의 J는 초반부터 몹시 불안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휘말리며 불안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J는 미칠 것 같은데, 아니 사실상 미치기는 했는데 완전히 돌아버리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J가 죄를 짓거나 광기에 휘말릴 때마다 붉은 조명이 등장하는데,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극을 이끈다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J가 상황에 휘둘려 어쩔 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금요일의 J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고 토요일의 J는 미친 와중에도 자신이 아주 작게 보존된 탓에 '어떡해, 다 망했어....'하고 울부짖는 이성이 좀 남아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에 타 운전대를 움켜쥐고 절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데,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브레이크를 밟아는 보는 정신 상태였죠. 금요일의 J는 속력을 올려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J가 시체를 대하는 방식도 금요일 공연과 달랐습니다. 자꾸만 웃고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지르는 금요일 J와 다르게 일요일의 J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시체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설득하려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시체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던 금요일의 J와 다르게, 토요일의 J가 시체에게 말을 걸 때면 본인에게 하는 말 같았습니다. 교수가 죽은 희생자들에 대해 처음에는 '여기서 멈추면 살인자에 불과하다'고 구슬리다가 후반부에는 그들이 시체에 불과하며 모두 그의 죄라고 비난을 할 때 그들은 살아있고 노래가 되었다고 외치는 모습도 무척 필사적으로 보였습니다.
토요일의 J는 쇼팽의 흑건을 단숨에 연주한 S를 질투하면서도 흠모합니다. 타임라인을 정리하면, 이후 10년간 작업실을 함께 쓰며 친해지게 되지요. 그러나 S는 돈이 필요해 교수에게 자신의 곡을 팔고, 이때 남이 자신의 곡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J에게 이 점에 대해 상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S에게 J는 사실상 뮤즈이며, 그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어차피 누군가 자신의 곡을 가질 것이라면 J라면 좋다는 진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우이며, 적어도 K교수처럼 위대한 작곡가-예술 운운하는 주제에 돈을 주고 몰래 사들여 명예를 얻는 짓은 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J의 곁에 있으면 곡이 술술 나오는데 그것 하나 주는 것이 어려울까요. 그가 J에게서 영감을 얻듯 J도 자신의 흥얼거림에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S의 이런 생각과 달리 J는 범재로 하루하루 말라 죽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쉽게도 곡을 쓰는 S 옆에서 단 하나의 멜로디로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천재의 아이디어를 사용해 상을 받았다는 것이 자신의 온전한 실력으로 느껴질 리 없습니다. 그가 흥얼거린 아름다운 곡조에 살을 붙여 상을 받기야 했으나, 그것의 뼈대는 견고한 천재성으로 이루어진 탓에 겉만 엉성한 자신의 부품을 옷처럼 입은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교수가 제안을 해왔겠지요. S는 교수가 어떻게 명성을 쌓은지 알기 때문에 J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음을 알았을 테고, 이후로는 작업실에서 교수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현재 극의 상황이 이어집니다.
J는 S의 천재성을 끌어내는 뮤즈이고, S는 그를 사랑하는 피그말리온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J와 완전히 별도의 삶을 원하지 않죠. 보통 친구가 사람을 죽였을 때 느낄 (그걸 모른다고 해도) 달라진 친우를 향한 거리낌과 꺼림칙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살인자임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며 이 상황이 되도록 몰아간 K교수에 대해 분노하죠.
토요일에는 특히 '빛 바래지지 않게'넘버가 설득력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너에게 갈게'라는 노랫말이 특히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J는 S에게 '너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거였지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바로 그 점 때문에 S에게서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존재를 평생에 걸쳐 신경쓰겠노라는 다짐과 같습니다.
S를 찌른 후에 금요일의 J보다 더 동요했는데, 정말로 극에 전반적으로 언급되는 '악마'가 씌였다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위에 언급한 <위플래쉬>를 '왓챠피디아'에서 검색하면 호평 일색입니다. '천재적 재능의 뒷모습 광기, 그 광기에 우리는 환호한다', '이 둘의 숨막히는 신경전마저 동경할 수 밖엔', '광기와도 같은 예술이 아니라 광기가 곧 예술', 'Good job에 멈춰 있는 사람들', '당신의 나태를 두들겨 패 드립니다', '성스럽고 위대한 이 채찍 자국은 평생 남아도 부끄럽지 않다'.....
처음 개봉했을 때 사람들이 이 영화를 '갓생 살고 싶어지는 영화'쯤으로 생각한 것만큼 한국 사회의 병듦을 빤히 비추는 것이 달리 있을까요?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굿 잡, 이만하면 됐어, 하고 아픈 손을 털며 쉴 줄도 아는 사람들에게 미친 대머리 선생이 고함 지르는 동기 부여 영화 따위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주인공 앤드류의 미래에 대해 말했습니다. '앤드류는 슬프고 공허한 빈 껍데기 인간이 되어 서른의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한국인이 동기 부여, 자극, 열정에 대한 선망을 받는 것은 창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위 플래쉬>와 <광염소나타>는 비슷한 상황에서 주인공의 결정적으로 다른 선택으로 갈라집니다. 미치광이를 따라,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눈으로 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전의 자신은 모두 내버린 채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주인공과 악마를 피해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채 문을 잠근 주인공으로 나누어집니다.
저는 예술을 사랑합니다. 광기에 가까운 예술들이 때로는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술은 광기와 동어가 아닙니다. 예술을 위해 자신을 고난에 밀어넣는 자들, 고통을 맛보는 자들, 광기에 가까운 윤리적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수위의 행동을 저지르며 비명을 지르는 자들은 이것을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그것에 감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K교수가 말한 것처럼 '베토벤 이후의 음악이 꽃이나 연회 따위를 묘사하는 데에' 그친 것이 정말로 나쁩니까? 예술을 위하여 윤리를 저버리는 것만이 생생한 예술이라면 그것은 조금 이상하고 연비 나쁜 일입니다. 성화를 그리는 데에 신의 얼굴이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K교수의 충동질은 그래서 질이 나쁘고, 단 한번도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완성해본 적 없는 사람답습니다.
금요일의 J는 망설임 없이 불을 지른 작업실의 문을 잠구어버리고, 토요일의 J는 문앞에 서서 조금 망설이다 문을 잠굽니다. 그는 문만 열고 뛰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속 지옥으로 향하는 문에는 그 유명한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저는 작업실 문이 지옥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밖으로 나가면 지옥인 것입니다. 이 작업실이 지옥일 수도 있지만, 그가 작업실 밖으로 살아 나가서 계속해서 사람을 죽이고 정신을 잃으며 그가 사랑한 음악에 대한 마음도 훼손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희망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지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