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찬 Apr 27. 2023

사랑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

<킬링 로맨스>, 그리고 '빠순이'가 보내는 편지

왓챠피디아에 가면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해) 영화가 주는 고양감에 거나하게 취한 씨네필들의 코멘트란은 이동진을 삼킨 코멘트로 가득하다. 예컨대 <메기>를 보았다면 이런 식이다.

툭, 물살을 가르고 희번득 튀어나온 진심과 진실. 우리 사이를 유지하던 것들의 손쉬운 붕괴.

하여튼 왓챠피디아에는 무척 좋은 코멘트들로 가득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왓챠피디아 코멘트는 바로 '잘한 지랄은 높이 평가한다'는 코멘트다. 그건 어디에 있느냐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코멘트란에 있다.

공식 포스터가 아닌 제가 포토샵으로 가공한 눈길 끌이용 썸네일입니다. 공식 포스터 구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영화 <킬링 로맨스>는 분홍색 재앙처럼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코멘트란에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하는 위풍당당함을 선보였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코멘트가 별 다섯개를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 주었던 것처럼, <킬링 로맨스>는 미칠 거면 보는 사람 뻘쭘하게 하지 말고 정신 교란에 가깝게 제대로 미치라는 슬로건을 박아놓고 찍은 영화 같다.


어떻게 영화가 웨스 앤더슨, 노라조 뮤비, 이마트 SSG CF, 별에서 온 그대, 와이 킬 우먼, 스타트렉, 스텝포드 와이프, 사운드 오브 뮤직, 라라랜드, 헤어질 결심, 그리고 그 외 수십편의 영화를 잡아먹은 커비 같은지?


영화를 보기 전, 어딘가 부장님의 채근에 못 이겨 회식에 참석한듯한 사원의 얼굴을 하고 시사회나 홍보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선균 배우님의 얼굴을 보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영화의 시작부터 나는 생각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나 넷플릭스 <마틸다>를 토핑으로 올리고 만들면 이런 느낌이겠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화사하고 매혹적인 영상미와 콜라주 작품처럼 굴러간다. 가끔 살바도르 달리가 지나친 해석과 사유를 조롱하고자 만들었다는 <안달루시아의 개>가 생각날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왓챠피디아에 우울하고 힘든 <릴리슈슈의 모든 것> 같은 영화 보면서 시적이고 우울한 감상을 남기는 씨네필들을 앉혀놓고 맨인블랙에 나오는 뉴럴라이저를 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되는 대로 말해가며 아무튼 그렇다고 쳐, 하고 손사래를 친 다음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어떠한 함축된 의미는 있겠지만, 일단 들어왔으면 오락과 영화를 좀 즐겨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애가 운동회에서 받아온 금붕어 죽었다고 거짓말하고 하수구에 버리면 이렇게 된다니까"


영화의 장르는 분명한 코미디다. 절반쯤 찬 관내에서는 러닝타임 내내 폭소가 끊이지 않았다. 코미디의, 코미디를 위한, 코미디에 의한 영화였다. 너 여기 웃고 싶어서 들어온 거 아냐? 죽여주게 웃겨주지...... 하고 악당처럼 고양이를 무릎에 얹고 손바닥을 문지르는 감독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죽여주게 웃겼다.


한국인들 밈 좋아한다. 시쳇말로 '뇌 빼고 만든' 것 좋아한다. 그런 걸 보면 오히려 무슨 뜻인지 창작자의 의도를 넘어선 해석을 자기들끼리 만들기도 한다. 노라조의 신곡 뮤비에 줄줄이 달린 댓글, 노동요로 유명한 핵폭발 사진 앞 뻘건 엘모짤 플리 'SAKE L' 뮤비에 있는 댓글만 봐도 그렇다.

왜냐하면 일단 그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킬링 로맨스>도 그렇다.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결국 영화에 대한 입장 차이다. 그렇지만..... B급을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한다. 어중간하면 종종 낯부끄러운 졸작이 된다. <킬링 로맨스>는 제대로 바닥을 구르는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 같다.


그렇지만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는 관내에서 후반부쯤 나는 줄줄 울고 있었다. 내가 심오하고 대단한 해석을 찾아낸 씨네필이라서가 아니고(전 씨네필은 아닙니다), 내 사적인 경험이 <킬링 로맨스> 속 러닝 타임 내내 내가 지독히 미워한 범우와 뒤엉켰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여래는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던 조나단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스텝포드 와이프> 속 부인들을 트로피처럼 방실방실 웃는 기구처럼 두려던 스텝포드 마을 남자들처럼 여래를 예쁜 트로피처럼 취급한다.


존나, 혹은 조나단은 계속해서 H.O.T.의 '행복'을 부르고 여래에게 '행복'을 강요한다. 그가 행복을 계속해서 이상하리만치 강조하기에, 나는 그가 꼭 행복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여래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사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고 밉살스럽고 자존감 낮아보이게 승부에 연연하는 이 남자가 사실 그리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보통 우리 친구지? 같은 말은 우정에 문제 없을 때 안 하듯이.

조나단은 또 여래를 정신병을 앓는 환자 취급을 하고, 식사부터 이동까지 일상을 통제한다.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것을 모자라, 가정 폭력 장면의 클라이막스를 귤을 던지는 것으로 영화는 표현했으나 어디까지나 한겹 덧씌워진 안전 장치처럼 보였다. 이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이기 때문에 그가 몹쓸 인간임을 나타내면서 관객에게 쿠션을(질식용 말고) 안겨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래의 팬 범우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여래를 돕겠다고 나선다. 나는 그래서 그때부터 범우가 여래의 새로운 백마 탄 왕자, 구원투수가 될 줄 알았다.


나는 케이팝 팬이었다. 지금 영원히 '안녕'하고 닿지 못할 섬으로 떠나 우리 곁에 없는 아이돌들의 팬이다. 그들이 내 곁을 떠난지는 몇 년이 되었다. 어제까지 라방에서 본 얼굴들, 라디오에서 듣던 사랑하는 목소리를 징그럽게 호기심으로 파헤쳐대는 속보 이후로는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참, 남의 불행에 어찌나 관심이 많던지. 뒤늦게 과거의 순간 순간을 클립으로 따와 입방아를 어찌나 찧고 까불어대던지.


그래서 범우가 성덕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가, 최애와 옆집에 살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최애를 도울 수 있다니. 팬질이라는 건 결국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허공으로 끊임없이 사랑을 던지고 또 던진다. 사람에 따라서는 스타가 나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의 지인이 될 수도 있고, 행사장 바깥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러한 행운을 가지지는 못한다. 나는 수많은 '여래바래'처럼 살았었다.


그래서 범우에게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그 정도 마음이야? 하고. 도와준다면서, 난데없이 조나단과 교감이라도 했는지 겁이라도 제대로 먹었는지 사우나에서 조나단을 구하고 집에서 청국장을 연이어 들이키질 않나 쿠션으로 얼굴도 짓눌러주지 않나.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일 범우가 살인을 도왔어도,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의 '누나'는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이토록 사랑만 앞선 허술한 계획으로는 수사가 들어와 끝장날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모두가 왁자하게 웃던 후반부,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이것이 되도록 머리 비우고 가볍게 웃으며 보라고 만든 영화란 것은 알지만, 한때의 나와 무척이나 닮은 범우와 여래를 구하지 못하는 범우의 사랑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범우의 사랑은 여래를 구하지 못한다. 범우는 그가 쓴 마스크처럼 배트맨도 아니고, 대단한 지위에 있지도 않다. 삼수생인데 정신이 나가 있기까지 하다.


빠순이로 살며 이 사랑이 가슴을 부풀리면 가끔 언니와 오빠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딱히 보답받지 않아도 좋을 이 사랑이면, 어리석게 뛰어들어 무언가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영영 닿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동안 한 연애에서 상대에게 말하면 말하는 대로 표현되었던 1:1의 사랑과 팬질은 다르다.


팬과 연예인 소통의 시대라지만 팬과 연예인은 지인이 아니다. 내가 똑바로 살고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해도 똑바로 안 살고 감옥을 간 미친 오빠들이 있기도 하다. 그건 진짜 내 탓이 아니다. 법과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오빠 하고 싶은 거는 다 하고 살라니까 앞은 걸러듣고 오빠 하고 싶은 거는 다 하고 살라니까, 만 들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로는 그를 지상에 붙들어놓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엔 사랑한다는 말이 더없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내겐 원망이 없다. 다만 나는 앞으로 밥도 잘 먹고 운동도 하고 나이를 먹겠지만, <킬링 로맨스>와 같은 코미디 영화를 보며 나조차 알지 못하는 순간 그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원망이 아니라 내 사랑이 잔존한 것이다.


각자의 일상을 사느라 얼마 못 모였다는 여래바래 회원들과 여래가 재회한 장면에서 그래서 울었다. 사실 우리는 타인이다. 여래, 언니 오빠를 사랑하긴 하지만 내 마음은 거기까지다. 범우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수능 끝나고 하면 안 되냐고 물었던 것과 같이. 내 일상이 있고 앞에 해결할 문제가 있으면 언니오빠는 밀려난다. 나도 안다. 사람은 사람의 낙원이 될 수 없단 거.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단 걸. 이 가벼운 마음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그렇지만 이건 사랑이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들과 우리만의 수신호가 당신의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여래바래들이 <스타트렉>에 나오는 것을 닮은 손 동작을 하는 것이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범우에게 한 실망보다는, 결말에서 내가 느낀 마지막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여래가 섬으로 떠나지 않고, '폭망'하긴 했지만 팬들에게는 최고의 차기작을 내놓았으니까. 심지어 뮤지컬 영화니까!


사랑만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한 작은 선한 행동은 조각이 되어 그를 돕는 부메랑처럼 돌아왔으면 좋겠다. 조나단의 머리를 친, 한심할 정도로 파괴력 없고 적을 자극하기만 한 부메랑 정도라도. 그리고 어쩌면 조나단을 물어간(?) 타조만큼 돌아왔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