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의 제목은 아주 초반에 등장한다. 바로 우리가 찡그리는 미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삼각형'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위가 뾰족한 삼각형인데, 사실상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꼭짓점이 아래로 뒤집힌 삼각형임을 알게 된다. 뒤집힌 삼각형은 결코 똑바로 설 수 없다.
영화는 여성-남성간 젠더 권력을 전복할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청소 노동자 간의 권력 역시 전복을 꾀한다.
처음 1부부터 남자가 여성보다 페이가 적고 동성애자의 추파를 감내해야 한다고 설명된 모델업계 배경 설정으로 시작해 2부 속 러시아 갑부의 아내가 '을'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고분고분 샴페인을 따라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젊은 여성 승무원에게 우리는 모두 평등하니 역할을 바꾸어 너는 내가 되어 수영하며 놀고 자신은 선장에게 가는 '놀이'를 하자는 것이 모두 2부 후반과 3부에 예언의 실현처럼 발화한다.
바로 모계 사회의 형태로 여성 청소부 애비게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표류자들과(1부 모델업계 모습) 뒤바뀐 권력구도(2부의 서로 역할 바꾸기)로.
호화로운 배, 온통 백인 일색뿐인 윗 갑판의 세계에 돈 있는 순서대로 권력이 피라미드처럼 쌓인다. 백인 크루들은 절대 'NO'라고 외치지 못하도록 교육받는다. 선생님, 제가 샴페인을 따라드릴게요. 그럼요, 필요하시면 유니콘도 데려올 수 있답니다. 그들을 지휘하는 관리자 폴라는 그렇게 말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서비스직인 이들이 고분고분 순종할 것을 명 받은 후 받는 당근은 돈이다. 그들은 돈에 열광한다. 발을 구르며 환호하는 이들 발아래에는 그보다 더 낮은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호화로운 여객선에는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백인 상류층들-선장-백인 크루들-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물건처럼 수납되어 보이지 않게 일하는 동양인들.
복도에서 동양인 청소부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손님들 눈에 보이지 않고 '더러운 것'을 치울 때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동양인 화장실 담당 청소부 애비게일은 원시적인 환경에 놓여서,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권력자가 된다. 그동안 해온 노동 탓에 물고기를 잡고 요리하고 불 피우는 지식으로 무인도 속에서는 최상단의 권력자인 것이다.
바깥, 문명사회에서 권력 있는 남자가 하던 것을 애비게일은 이곳 무인도에서 할 수 있다. 경제력을 뽐내고, 힘과 지식을 뽐내고, 마음에 드는 젊은 남자를 취한다. 야야의 말처럼 함께 표류한 늙은 남자들을 제치고 모계사회를 이룬 것이다.
애비게일이 자신을 '캡틴'이라고 부른 순간 자신의 안에 납작 엎드렸던 야망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며, 암만 선장이 개차반에 책임감 없이 행동해도 배 밖으로 내던지는 대신 허수아비로라도 세워야 하는 특유의 폐쇄성을 그대로 가져와 배 안에서는 없었던 권력을 이 섬을 자신만의 '배'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러시아 부자의 아내가 승무원에게 수영을 요구하고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부분의 역겨움이다. 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즐기라'는 명령이 주는 곤혹스러움을, 말 한마디에 조종당하는 이들의 입장을. 그리고 자신이 시혜적으로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자긍심을 갖는다. 이것은 슬라이드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배밖으로 내던지는 듯한, 혹은 밀어내는 듯한 이미지로. 그것은 꼭 어린애가 내키는 대로 인형을 쥐고 놀다 내버리고 휘두르는 듯하다. 극단적으로(그리고 바빌론을 뛰어넘은) 더러운 이미지를 동원한 탓에 슬삼의 구토와 역류하는 변기는 그래서 일종의 징벌이자 폭로행위를 닮았다.
고상하게 숨긴 치부가 들추어짐이 역류하는 변기인 것이고, 그들이 토해내는 토사물이다. 그래서 멀미에는 음식을 먹는 게 좋다며 계속 권하는 직원들이 벌을 주는 것처럼도 보였다. 정신없는 토사물-역류 씬은 뒤로 갈수록 직원들이 덜 보인다. 직원들을 폭로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완전한 전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명으로의 복귀는 실각을 뜻하기에 그가 바위를 든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될 것이기에 그것은 전복이 아니라 일시적인 사건이기에 생략된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