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지 오브 울트론>,<완다 비전>,그리고 그 이후의 완다 막시모프
<완다 비전>의 이 장면은 데자뷔 그 자체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 장면과 같은 포즈로, 그리고 유사한 앵글로 완다가 무너지는 장면이 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자신의 반쪽인 피에트로가 죽었음을 안 순간이다. 이때 본능적으로 쌍둥이이자 자신의 절반이기도 한 피에트로 막시모프의 죽음을 느끼고 완다는 자신의 능력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무너진다.
완다 막시모프가 이러한 포즈로 무너지는 것은 오직 완전한 상실을 깨달았을 때로,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이를 잃었을 때 완다는 무릎을 꿇는다. 이 포즈는 <에이지 오브 울트론> 콘셉트 아트에도 있는 것으로, ‘완다 막시모프’ 배우인 엘리자베스 올슨은 이 포즈를 완다 비전에서도 사용한다. 매끄럽게 연결되어 스칼렛 위치의 시그니처 그 자체가 되어버린 ‘비탄과 고통’을 형상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완다 막시모프는 비전을 죽일 때, 그리고 죽은 것을 보았을 때까지는 자신의 반쪽이기도 했던 피에트로의 죽음을 심장이 파괴되는 듯한 고통으로 느꼈던 것처럼 실감하지 못했으나 비전이 남긴 이 터를 본 순간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미래가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에 무시무시한 상실의 고통이 완다를 좀먹는다. 바로 이 순간, 완다는 ‘비전’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아, 내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파괴되고 희생되어 죽고야 말았는데 이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 생각에서 발생한 것이 ‘잃은 것들’을 되돌린 <완다 비전>이다. 세상은 완다 막시모프에게 지독하게 군다.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의 상징색이 비둘기의 피와 같은 적색이라는 것부터 해서.
비전이 ‘완다 막시모프’에게 남긴 것은 다름 아닌 삶이다. ‘비전’, 즉 ‘미래’를 남긴 것이다. 그 빈 터에 집을 짓고, 가구를 고민하고, 신중히 채워 넣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꾸고……. 비전이 원한 것은 결국 완다의 재정비이다. ‘내가 없어도 완다가 살아갈 수 있기를, 집을 가지기를, 이 작은 마을에서 평화를 누르기를, 내가 없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 완다 막시모프가 완다의 미래를 고민하기를’ 원한 것이다. 그는 완다 막시모프를 깊이 사랑했다. 그래서 완다에게 당장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온전히 완다 막시모프가 고민해 채워 넣은, 완다 막시모프의 것으로 채워진 집’을 만들기를 바란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없는 세상에서 완다가 걸어갈 길은 완다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지으려면 앞으로 얼마큼 더 기다려야 하고, 가구를 들이려면 앞으로 살면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그건 미래로 향하는 길이다.
그래서 완다는 집을 짓긴 했다.
비전도 지어버렸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집을 짓다’와 ‘로봇을 만든다(아무튼 그는 로봇이기는 하니까)’에서 쓰는 단어가 똑같이 ‘built’라는 것이다. 완다에겐 그 둘 모두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집’과 ‘로봇’이 완다에겐 같은 개념이다. 도대체 어디가 같은가?
완다에게 ‘집’이란 비전이 있는 공간이다. ‘시트콤’에는 주 배경이 되는 세트가 있다. 보통 가족 시트콤일 경우 그것이 ‘집’이다. 말하자면 ‘인물’이 있는 곳이다. 완다에게 비전이 없는 곳은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전’과 ‘아이들’을 포기한 마을에서 아주 떠나버린 것이다. 그곳은 이제 완다의 집이 아니다. 비전이 남긴 유산이고 그곳에 아이들과 함께한 추억이 있지만 비전은 이제 없다. 다시 자신이 저지른 짓을 되풀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완다는 집을 영영 잃은 것이다.
완다 막시모프가 최초로 ‘집’을 잃은 순간은 처음 완다의 집 위로 스타크 사의 로고가 새겨진 폭탄이 떨어졌을 때 사라졌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집이 사라진 후에는 피에트로가 완다의 집이었다. 그들에게는 서로뿐이었다. 그다음에는 비전이 완다의 집이었다. 나는 완다에게 이후 그들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겨야만이 완다가 집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완다 비전>에서 완다가 행복한 흑백의 시간을 보내다 본 최초의 색은 바로 붉은색이다. 헬리콥터의 노란색과 붉은색, 그리고 도티의 피인데, 이 피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도티의 의미심장한, ‘가정주부는 어떻게 리넨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곧이어 ‘스스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피의 색인 붉은색으로, ‘스칼렛 위치’의 상징색이다. 두 번째는 ‘고통’이다. 스칼렛 위치를 탄생시킨 실험의 고통, 부모님을 내전으로 잃은 고통,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쌍둥이 피에트로 막시모프를 잃은 고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전을 잃은 고통이다. 완다에게는 붉은색이 존재한다. 그가 환상 속에서 ‘집’에 있음에도 그가 입은 의상에는 조금이라도 붉은색이 들어간 것이 많으며, 이 붉은색은 사실상 ‘이곳은 집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표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완다 막시모프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완다가 '가정'을 필요로 하는 데에는 그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가 가족을 간절히 원하는 건 너무 어릴 때 전쟁으로 '가정'이 파괴되어서다. 완다는 틴에이저 히어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불안정하고, 외로워 하는 모습이 <에이지 오브 울트론> 직후까지 존재한다. 그가 <완다비전>속에서 어머니가 되길 꿈꾸는 것도 결국 완다에겐 이제까지 선택권이란 게 없어서다. 완다는 아직 혼란스럽고 헤매고 있는데, 그가 아는 안정감은 '가족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다. 완다는 자신이 잃은 것을 무척 이상화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고자 하고, 동시에 이를 베푸는 것도 꿈꾸는 것이다. '엄마'를 만들 수는 없지만 자기 아이들에게 자신처럼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게 <완다비전>에서 아이들로 나타난 것이다.
완다는 사실 <완다비전> 이전까지 틴에이저에 갇혀있던 셈이다. 몸이 아니라, 그의 트라우마가 있는 정신 속에. 그리고 <완다비전>에서 아이를 키우고 돌보고 사랑하며 완다도 성장한 것이다. 그가 아이들이 데려온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정하고, 그 강아지가 죽은 것을 본 순간 완다는 완전히 성장할 준비를 마쳤다. '스스로' 할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