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꿈이 된다.
언제나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나와는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며 살아가지요. 이렇게 혼자일 틈이 없는 이 시간에 문득문득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하늘을 보며 비를 보거나 해를 보거나 했어요. 내 삶에 선택권이 생겼을 때에는 그럴 느낌이 들 때면 많은 모임에 소속되었고 더 열심히 나를 움직였습니다.
그때는 내가 활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얼마 전 좋아하는 강사의 강의를 듣다가, 결핍은 꿈이 된다 라는 말에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하더라고요. 엄마가 되니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며 나를 변화하려는 내 모습을 보며, '엄마니까'라고 단정 짓던 하나의 퍼즐이 제 위치를 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큰 딸입니다. 일명 K 문화권의 장녀. 2살 터울의 동생이 하나 있는데, 제 느낌상 7살 터울 정도로 자라왔던 것 같습니다. 동생과 나는 거의 3년 차이가 나는데, 동생이 태어나던 병원 복도가 이미지인지 실제인지 모르게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 아빠는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책임질 사람이 태어나는 거야.'
그렇게 동생을 챙기고 때로는 구속하며 지내다가 동생이 중학생이 되면서는 꽤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의 위치에서 동생을 항상 바라봐 왔던 것 같아요. 대학생이 되고 서로 공유할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지만 공백의 시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특히 엄마는 저를 큰 아들처럼 대하셨던 것 같아요.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수도 있을 거고요. 제 또래의 부모님보다는 나이가 많으신 아빠보다도 더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가 자라셨던 환경이 그랬건 것 같아요.
언제나 혼자 잘하는 아이, 자기 할 일은 스스로 찾는 아이, 해결하는 아이. 엄마는 엄마가 그랬던 것 처럼 저를 그런 묵묵히 할 일을 하는 큰 딸로 자라게 해 주셨어요.
엄마와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혼자 해결해야 했고, 엄마가 함께 하자고 다가왔을 때에는, 언제나 감독 위치에서 저를 바라봤던 엄마와 무언가를 나눈다는 게 어색해져 버렸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결정 내릴 때도, 독립을 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저는 제가 선택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엄마도 많이 외로웠겠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외로움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내 딸. 결혼하면서도 잘 몰랐는데 육아라는 것은 참 대단합니다.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내어 줍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 성향과는 다른 일을 선택하고, 이 따뜻한 말이라는 것에 집착하며 사는 이유는 제 어린 시절의 결핍이었습니다. 나를 돌봐주는 따뜻한 말, 공감받는다는 느낌이 꽤 부재했던 어린 시절이 저를 이렇게 말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수련하며 살게 만들었다는 것을요. 저희 부모님 세대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인 줄은 이제는 잘 압니다만, 저는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던 것 같아 어린 시절 문득문득 외로워졌습니다.
육아 전문가들의 말을 글과 영상으로 빌려 보면, 아이를 부모의 생각으로 통제하려 하지 말고 마음을 공감해주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합니다. 예를 들면, "네가 많이 슬펐겠구나, 이럴 땐 이렇게 하는 방법도 있단다"라는 공감과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하는 어투의 말을 장착하는 것이지요. 말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고 있어도 이게 참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결핍이 저를 생각하게 만들고 제 일이 되었고 수련하게 만듭니다. 엄마 아빠의 감수성을 닮은 우리 딸은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안 될 때도 참 많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점검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도 빠른 속도로 커가는 아이에게 어제보다는 조금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