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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잇 Dec 19. 2023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해가 저문 저녁의 1학년 1반 교실에는 나와 낼모레 정년을 앞두고 운 나쁘게 1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 항상 단 둘만 남아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계셨다. (내가 한글을 뗀 것은 이 시점에서 3년이 지난 4학년 때이다.) 선생님은 가르쳐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나를 보고 높은 절벽 위 경치에 감탄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듯 들숨을 하고 풍선을 불어 아주 큰 왕관을 만들려는 광대처럼 날숨과 한숨의 그 사이를 크게 뱉으셨다. 그렇게 선생님의 들숨, 날숨, 한숨과 함께 1학기가 시작하는 봄부터 2학기가 끝나는 겨울까지 매일같이 교실에 남아서 한글 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분명 선생님은 나를 너무 미워하다 못해 가만 두고 볼 수 없어서 늦은 시간까지 집에 보내지 않고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멍청한 오해를 한 문맹 아이는 세월이 지나 자기 이름도 쓰고, 글도 쓰고, 회사 보고서도 곧 잘 쓰는 성인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집에서 오래된 초등학생용 한문 공책을 발견했다. 공책을 펴보니 칸마다 한글로 선명한 글씨 아래 따라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가 써져있었다. 그날 잠 못 드는 어두운 새벽에 갑자기 스치듯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선생님은 정말 나를 미워하셨던 것이었는지 가물가물한 기억 속을 헤집어 돌아가는 주마등에 그림을 그리듯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제 와서 기억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자면 “나”라는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잡무를 위해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낼모레 정년을 앞둔 공무원, 본인의 명품 지갑 대신 스승의 날에 학부모가 선물한 퀼트 지갑을 쓰는 선생님, 지우개 살 돈이 없어서 교실 구석에 버려진 더러운 지우개를 쓰는 아이에게 깨끗한 새 톰보우 지우개를 주며 그런 지우개 다시는 쓰지 말고 필요하면 나한테 언제든 말하라고 한 멋진 할아버지, 받아쓰기 쪽지시험 때마다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반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나를 위해 본인이 먼저 연필로 꾹 꾹 눌러쓰고 지운 자국이 남은 시험지를 아이들 몰래 주신 은사의 모습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한문 공책을 펴서 선생님의 글 아래 덜 써진 글자들을 채워보았다.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글씨’ 같다고 놀림받던 내 글씨는 제법 선생님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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