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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토프 Sep 13. 2024

노란불에 멈춰요

여덞 살의 수정 - 2

다른 사람의 운명을 거스르는 일은 안된다고 했다. 둘의 인연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으니 운명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미술학원 창문너머로 퇴근하고 나오는 아빠회사 동료들의 얼굴을 쭉 훑어본다. 


"수정아, 위험한 거 같은데. 내려오렴."


"선생님! 저기 보이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예쁜 거 같아요?"


"사람구경하는 거였어? 저기 아빠 계시네."


"누가 제일 예쁜 거 같아요? 빨리요~"


"음... 말하면 내려올 거지? 저기 키 큰 여자."


내 눈에도 선생님의 눈에도 그 여자였다. 


"선생님 저 오늘은 먼저 내려가 볼게요~"


"아빠 오고 계시는데 조금만 기다리지 왜?"


"저 녀.. 아 예쁜 언니랑 얘기해봐야 해서요. 걱정되면 창문으로 지켜보세요~ 안녕히 계세요!!"


재빨리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온다. 아직 두 계단 씩 내려가기엔 다리가 짧다. 서둘러 그 무리를 만나야 했다.


"아빠! 아빠~~~~~!"


있는 힘껏 배에다 힘을 주고 아빠를 불러본다. 오른쪽 왼쪽 차가 오는지 살펴보고 아빠에게 뛰어간다. 


"왜 벌써 내려왔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랬지~ 안녕하세요~"


"아 첫째. 수정이야."


"안녕~ 과장님을 많이 닮았네요."


남자 둘, 여자 둘 3개월 전에 입사한 신입직원들이다. 이 회사는 너무나도 가족 같은 회사여서, 1년에 두 번씩 가족동반 워크숍을 했다. 그러니까 가족들의 얼굴도 다 아는 사이끼리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귀엽고 예쁘다고 나랑 사진을 찍어서 남겨놓으면 안 되는 거였다. 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했다. 출장을 누구랑 갔을까. 가긴 한 걸까. 


"아저씨~ 아저씨가 우리 아빠랑 저번에 같이 출장 갔어요?"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아니라고 하면 저 여자 얼굴이 어떤 표정이 될까. 


"응 맞아. 나랑 여기 이모? 언니? 랑 셋이 갔지. 뭐라고 칭해야 할까요? 어렵네요. 저도 아저씨 소리는 처음 들어서 "


"언니라고 하죠~ 저번에 우리 통화했었잖아. 기억나?"

 

당신인걸 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봤다고, 당연히 기억한다고 어찌 잊겠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네, 기억나요."


"수정아 뭘 그런 걸 물어~ 그건 왜 궁금한 거야?"


"아빠가 저 삼촌이 코를 너무 골아서 잠을 거의 못 잤다고 집에 와서 하루종일 잠만 잤잖아."


"아빠가 언제 그랬어~? 허허"


"그날 술 먹고 와서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아빠가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그러셨구나. 제가 첫 출장이라 긴장을 많이 해서 그랬나 봐요. 죄송해요 과장님. 다음엔 각방 써야겠어요. 그나저나 수정이랑 말싸움하면 지겠는대요?"


"응 그럼~보통이 아니야. 아이고 우리가 너무 오래 잡아뒀네. 얼른 퇴근해~~"


"과장님~저희 돼지갈비 먹으러 가는데 수정이랑 같이 가실래요?"


그 여자의 눈이 반짝인다. 나를 붙잡아 두고 싶은 건지, 아빠를 붙잡아 두고 싶은 건지 모르겠으나. 나조차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그러자고 할 뻔했다. 분명 마흔 먹은 내가 그 표정, 그 말투를 들었다면, 여우짓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을 텐데, 여덟 살의 나는 여우짓을 판별하는 능력이 없었다. 단단히 벽을 쌓아야 했다. 우리 집 성벽이 튼튼하니 깨부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엄마 아빠사이가 좋으니 넘보지 말라고, 우리 집의 평화를 깨지 말라고 해야 했다. 


"수정아. 너 돼지갈비 좋아하잖아. 먹고 갈래?"


"나 돼지갈비 안 좋아해."


"너 5인분도 먹잖아."


'오늘은 젊은 자네들끼리 즐거운 시간 보내고 가게. 나는 가족들이 기다려서 가봐야 하네.'라고 아빠입에서 무 자르듯 모범답안이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아빠는 항상 적당히 거절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듯했다.


"아! 엄마가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거 만든다고 빨리 오랬어!! "


그 여자가 들으라고 엄청 큰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응, 아빠.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주는 대로 먹는 게 우리 집 반찬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가야 해.'라고 눈으로 말하며 아빠손을 잡고 당겼다. 그 여자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돌아섰다. 눈깔 한번 뒤집고, 우리 엄마 울리면 네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야 라고 해볼까. 자네 이곳을 떠나게, 1년 뒤에 망신살을 당할 팔자네라고 해볼까. 아직 하지도 않은 엄마의 셋째 임신을 떠벌려볼까. 우리 아빠 좋아하지 마세요 한마디면 되는데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학교에서 야영이 있던 날, 아빠가 텐트를 싣고 학교에 왔었다. 친구들이 "너희 아빠 잘 생기셨다"며 다들 한 마디씩 했다. 그 말이 나는 듣기 싫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얼굴값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우리 아빠 엄청 잘생겼지~"라고 어깨가 으쓱할 만도 한데 말이다. 옛말에 장녀는 아빠를 닮으면 잘 산다고, 내 삶이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껴지는 건 아빠 얼굴값 덕이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내 지인들 중에는 유독 장녀가 많다. 장녀들끼리 통하는 게 있어서일까. 함께한 세월이 10년이 되어가니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놀라운 건 우리들의 아버지들이다. 너무나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장녀들의 생활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데는 엄마들도 한몫하겠지만, 아빠들도 만만치 않다. 너도나도 유년시절의 아빠 얘기를 시작하면 누가 더 불행하게 컸는가로 경쟁한다. 손가락 접기 게임처럼, 술버릇이 고약한가, 바람은 피웠는가, 도박을 하였는가로 이어지는 질문에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울지 않고 웃으며 누가 더 불행했었는지를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빠를 닮은 K장녀들이 잘 살고 있다는 증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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