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lin Jan 10. 2022

'자유의지' 라는 판타지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진행되어왔으며, 이것은 우리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영어 'free'는 독일어 'fri'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그보다 앞선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 'frijaz'로 '사랑받는'이라는 영단어 'beloved'를 의미하며, 'not in bondage', 즉 '속박되지 않은'이라는 속뜻이 담겨있다. 국어사전에 표기되어 있는 단어 '자유' 또한 自(스스로 자)와 由(말미암을 유)의 조합으로,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자면 자유란 꽤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구속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른다는데, 이쯤 되면 다양한 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물리적 구속만 없다면 무엇이든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럼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만약 외부의 구속 없이 몇 가지의 선택지가 부여된다면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 행위일까? 만약 그렇다면, 선택지를 더 많이 준다면 그것은 더 자유로운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모두는 짐승인 동시에 인간이며, 인간 삶의 핵심은 욕망을 이성으로 절제하고 이것으로 우리의 동물성을 정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칸트 역시 비슷한 입장을 덧붙였다. 그는 인간은 비록 동물일지라도 순수 의지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인간은  자연적, 동물적 성향을 넘어서서  그들이 확립한 도덕률에 순응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들의 동물성에도 불구하고 존엄성이 있다고 말했다.


토마스 홉스의 주장으로 넘어가자면, 그는 자발적인 결정과 결합된 행동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행동의 자유는 공식적으로 자발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발적인 의지는 행동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보자면 그의 입장은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칸트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홉스는 인간은 원래 갖고 있는 생물학적 성질 때문에 어떤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만, 자유의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앞서 말한 '의지'는 단지 의지의 행위를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자발적인 행동은 개인뿐만 아니라 외부 원인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복합적인 결과가 의지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한 사람의 자유로운 행동을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따라온다고 주장했다. 한 사람의 자유의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에서 누군가의 행동이 제약되거나 무조건적으로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는 사람의 행동에 다른 누군가의 강요 없이 자신만의 의지가 주어져야만 자유의지가 성립된다고 하는데, 모두 알다시피 인간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다시 말해, 피가 흐르는 육체를 가진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거기에 욕망과 감정이 섞이며 한 인간은 분명히 다른 인간과 구별되는 개인으로 존재한다.




철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면, 자유란, 그리고 인간이란 아주 복잡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와중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무런 신체적, 정신적 혹은 사회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자유의지의 실현이란 일종의 유토피아와도 같다.


따라서 자유의지란 외부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온전한 스스로의 선택이 가능한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상금 456억 원의 미스터리 한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최종 우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야기이다. 얼핏 보면 기존에 본 적이 있는듯한 서바이벌 쇼들 중 하나로 보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바로 자율성이다. 불공정한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던 사람들이 모여서 게임을 하는데, 재미있는 룰은, 절반 이상이 원하면 언제든 게임이 종료된다는 것이다. 원하는 경우 자발적으로 게임에 복귀도 가능하다. 그들에게는 공정한 경기 진행을 위한 아주 간단한 규칙만 있을 뿐,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들은 게임이 진행되면서 신체적, 재능적 한계를 깨닫고 그룹을 나눈다. 강한 집단은 그들의 자유를 위해 약한 집단을 억압하고 위협하며 역설적으로 자유를 빼앗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평등한 사회에 지쳐 평등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또다시 그 속에서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낸다.


한편 게임의 진행자와 그 부하들은 현실세계의 권력자들을 연상시킨다. 참가자들에게 게임을 계속할지 멈출지 등의 선택지를 주며 마치 자유를 주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데, 시청자들은 이것이 사실 참가자들을 통제하는 그들의 방식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들은 영리하게 참가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특정한 것을 택하면 나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환상, 자유의지가 있다는 환상과도 같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하고 심지어 그들이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 것처럼 믿게 만든다.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 종교, 윤리, 법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의견들은 중세부터 현재까지 논쟁이 되어왔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진정한 자유가 가능한가? 혹은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체감할 수 없는 거리에 있다면, 즉 보이지 않는 제한만이 있는 상태라면 그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요즘처럼 티브이나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한 나의 의지로만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사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개인의 완전한 자유의지의 실현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항상 법적, 도덕적 제약이 따른다. 인간은 항상 여러 가지의 선택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그것들 중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포기하기도 하며 그로 인해 스스로의, 혹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순수한 실천 욕으로 인해 본능적, 사회적 한계를 넘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며 이는 분명 짐승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자유를 빼앗기도 하고 과도한 정보의 방해로 인해 순수하게 자유로운 선택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자유의지의 실현 가능성과 상관없이, 인간은 세대를 통틀어 자유로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 그 자체로서 우리 인간은 이미 너무나 아름답고 존엄한 존재가 아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