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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in Jan 10. 2022

죽음은 나에게 무엇을 줄까

왜 인간은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삶에 대한 질문을 해왔을까?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과 미디어가 전 세계에 널려있고 그것들은 우리가 왜 사는지, 그리고 왜 죽는지 등을 묻고 있다. 정의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중에는 낭만주의, 허무주의, 쾌락주의, 그리고 실존주의 등이 포함된다. 삶과 죽음은 성별, 종교, 또는 빈부의 격차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동시에 누구도 답을 줄 수 없어 조심스럽고도 두려운 주제이다.


영혼이 불멸하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플라톤은 영혼은 육체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멸이 삶의 의미에 미치는 영향은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지만 영혼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여전히 흥미로운 토론거리이다.



의미는 어디에서 올까.

몇몇 철학자들의 인용으로 시작하자면,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불멸의 삶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마감이 없는 삶에는 아무런 동기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자 철학자인 빅토르 프랭클이 창시한 로고 테라피도 인간의 본성은 삶의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동기가 부여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은 의미 있는 삶이 만들어지는 데에 필수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떻게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일까, 왜 우리의 삶은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일까?


영혼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즉 100년 정도의 한정된 시간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의 의미를 살펴보자. 우리 인간은 신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시간과 순서는 시작과 끝이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 대조적으로, 불멸의 삶에는 연대순이 없고 그러므로 그곳에는 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을 분배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데 이것은 일이 될 수도, 혹은 여행, 또는 휴식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나 다른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나의 한정된 시간 중 일부분을 사용하기도 하고, 동시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쓰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들 안에서, 인간에게는 가치라는 개념이 자리 잡힌다. 제한된 시간 안에, 인간은 상대적으로 가치 있는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 물론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의 정의는 각양각색이겠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이러한 가치 있는 시간의 사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가치 있는 결과를 내기 위해 우선순위를 찾는 반면, 불멸의 삶에는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만들거나 더 중요한 것을 앞에 두는 등의 행동이 필요치 않다. 당연히 낭비라는 개념도 없을 것이고 시간 낭비에 결과로 따라오는 죄책감이라는 감정도 없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와 소중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 또는 덜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쫓지 않으니, 어떤 일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죽음과 함께 따라오는 또 다른 두 가지 개념은 동기와 창조이다. 세상은 죽음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들로 가득하다. 먼저, 인류의 역사와 항상 함께하는 종교에 대해 생각해보자. 미지의 영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신을 만들었다. 인간이 의지할 수 있고 때로는 우리 인간을 보호해 주는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셈이다. 또한 인간은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이 현재 살아가는 삶에 따른 보상이나 처벌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서양에서는 주로 천국과 지옥, 동양에서는 환생과 같은 컨셉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악의 구분이 생겨났고, 이는 역사적으로 인류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나라를 만들고 지도자를 세워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하고 두려운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틀을 만들었다. 세상을 더 안전하고 더 예측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법 안에서 신이 주관한다고 여겼던 보상과 처벌을 우리 인간끼리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행위는 자기 보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정된 시간 안에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고, 더 높은 목표에 도달하고 싶어 하고, 더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유산으로 남기는 행위는 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인간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창조해낸다. 우리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동수단을 만들었고, 살아있는 동안 더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주거환경을 개발한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루어낸 성과들은 참으로 경이롭다.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불멸 속에서 사람은 지루함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한한 삶에서 자극을 느낄 수가 없다. 흥미롭거나 매력적이거나 짜릿한 것은 그곳 어디에도 없으며, 도전적이거나 열정적인 행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멸의 삶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예로는 영화 속 뱀파이어가 있다.  뱀파이어는 무한한 시간을 가졌고, 당장 행동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다. 우선순위를 매길 필요가 없으니 당연히 어떤 일에도 중요도가 없으며, 무엇이든 내일로 미룰 수 있기 때문에 당장 할 의지도 의욕도 없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귀중함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니 인생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를 가진 적이 없다. 인간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느낀다. 가족,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삶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갈지  멈출지를 선택한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지, 무엇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괜히 유명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동시에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정말 많은데 항상 등장하는 클리셰는 뱀파이어가 잃고 싶지 않은 누군가 (한정된 시간을 가진 인간이어야 한다.)를 만나고 변화하는 장면이다. 계속해서 이런 스토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 우리들은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은 질문의 연속.

죽음은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영원하지 않은 삶은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 동기를 부여한다.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사실 삶의 의미는 답이 아니라 질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죽는지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과연 우리는 불멸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될까? 질문은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며, 그 자체로 삶을 이미 의미 있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끝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끝나지 않을 질문을 주고, 그 덕에 우리는 스스로를 알아가는 공부 속에 살아가며 동시에 죽어간다.

어쩌면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죽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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