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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May 25. 2024

인생은, '여행가방 싸기'처럼

나는 여행가방 싸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가방이란 것 자체가 묘한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상관없이 여행가방을 싸는 일은 즐겁다.


당신은 여행가방 속에 무엇을 넣는가? 나는 보통 옷가지와 여분의 신발, 작은 우산, 그리고 블루투스 스피커, 노트북, 몇 권의 책 같 등을 챙기곤 한다. 여행 기간과 무관하게 내 삶과 관련된 것들이다.


나는 보통 며칠에 걸쳐 여행가방을 싼다. 


어떤 사람들은 한번에 챙기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거실 한편에 여행가방을 펼쳐 두고 하루에 생각나는 대로, 그날 떠오른 만큼만 짐을 챙긴다. 며칠을 두고 챙기다 보면, 어떤 것은 넣었다가 도로 빼고 어떤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가 챙기게 된다. 그렇게 며칠을 두고 짐을 싸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다. 빠뜨리는 것이 거의 없게 되고, 효율적으로 짐을 챙길 수 있는 나만의 요령이다.


나는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하는 편이다. 


어떤 거대한 프로젝트에도 나는 그리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책을 한 권 쓰는 일 같으면, 누군가에게는 아주아주 버거운 일로 느껴지겠으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여행가방을 싸는 것처럼, 나는 일정한 기간을 염두에 두고 그날그날 생각난 것들을 가방에 넣듯, 조금씩 글을 써나간다. 이런 요령은,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달 여행 플랜을 짜는 일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몇 개 도시를 도는 플랜을 짜는 일이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플랜을 짜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선 어느 도시를 갈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갈 것인가, 며칠을 머물 것인가, 교통수단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등 미리 결정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통은 플랜을 짜다가 지치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 이런 일은 그저 시간을 두고 하나씩 처리해 나간다. 


공을 들여 큰 그림을 먼저 그리고, 큰 그림을 다 그린 후엔 조각으로 쪼개서 하나하나 좁혀 들어간다. 큰 그림을 짜는 일에 가장 긴 시간을 들인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로 가자. 언뜻 보면 간단한 것 같으나 이렇게 큰 루트를 짜는 일에 나는 가장 긴 시간을 들인다. 최종적으로 결정내리기까지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유럽 지도를 며칠 간 보면서, 이렇게도 그려 보고 저렇게도 그려본 후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 테스트 해 본다. 어떤 루트가 가장 이상적일까? 나는 그래 이 정도면 됐군, 하는 결론이 날 때까지 이 과정을 계속 해 나간다. 이것이 큰 그림이다. 큰 그림이 완성되면, 두 번째 스텝으로 나아간다. 그 안에서 어디로 이동할지, 무엇으로 이동할지, 숙소는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장편소설을 몇 권 써 내면서, 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에 대해 터득했다. 


일단 시작하고 나서, 마침내 끝 문장을 완성해내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니 나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산을 오를 때도, 긴 여정을 갈 때도, 운동을 할 때도, 하루 일과를 해낼 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여행 가방을 쌀 때도 그러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한 걸음이 모인 결과일 뿐이다, 라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때론, 그 한 걸음을 떼는 일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어느 땐 첫 한 걸음을 떼기 전부터 두려울 때가 있다. 난 멀리 보지 말아야 할 때를 안다. 때론 지금 단 한 개의 걸음을 떼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삶도 이러하리라. 마흔 중반을 넘기고 나서 나는 몇 번의 정신적인 고비를 넘겼다. 최근에 겪은 번아웃과 같이 내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난관을 만난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여행가방 싸기 훈련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해내고는, 잠에 드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내일 아침 눈을 뜰 때가 벌써부터 걱정되는데, 나는 내일 일은 내일, 이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그저 잠에 들려 눈을 감고 있는 그 순간을 즐기려 노력했다.


살면서, 과연 이것이 끝나긴 할까, 하는 고통의 터널을 만나곤 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일수록 난관은 더 높고, 더 깊고 더 아득한 법이다. 이것은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다. 여행가방 싸는 마음으로, 나는 약간의 설렘과 딱 한 스텝씩만 전진하는 방법을 통해 산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도 이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안고 산다. 


두려움이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부모가, 어른이 아이들이 가지는 두려움, 불안, 스트레스를 이해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그것을 조금이나마 걷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지금 네가 만나는 친구들은 네가 스무 살만 넘어도, 거의 볼 일이 없게 될지 모르는 아이들이야! 그러니 그 친구들과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해도 별일 아닌 것처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단다."


이 한 마디만으로도, 내 아이들이 친구 스트레스, 사람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라진다면, 오늘을 현명하게 살아내는 일에 대해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오늘 하루를 가뿐하게 살아내는 일이 너희가 할 일이란다. 마치 도마 위에 있는 애호박 하나를 가지런히 썰 듯이 말이야. 


이것은 내가 내 아이들이 터득하길 바라는 삶의 지혜다. 모든 일은 마찬가지야, 채소 하나를 썰 듯이, 여행가방을 싸듯이, 오늘 하루를 가뿐하고 상쾌하게 넘기는 것, 그것이 삶의 본질이란다. 세상에 거대해 보이는 그 어떤 일도 사실은 이러한 요령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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