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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 pire May 13. 2024

증상 조이스 (4)

Que ça fasse jeune homme est une retombée d'où je ne veux retirer qu'une seule chose.

그것ça(증상 조이스라는 이름)이 젊은 남자로 보이는 것, 그건 하나의 부차적인 효과(악영향, 낙하물, 진정)이며, 거기서 나는 오직 하나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C'est que nous sommes z'hommes.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입니다. 라깡은 증상 조이스의 이름을 그것ça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한다 ça parle. 라깡이 즐겨 사용했던 말이지요. 바로 충동, 무의식이 말한다는 뜻입니다. 


보통 충동, 무의식은 억압되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도착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변태적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그런 변태성을 충족시키게 된다면 문명이 유지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인간이 제어장치를 만드는데, 그게 바로 언어입니다. 그래서 후기 라깡은 언어가 거세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종족번식을 위해서만 성관계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성관계는 쾌락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요. 


성관계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타자와 다른 타자가 만나 융합된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라깡은 융합적 하나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며 비판합니다. 


하지만 고대부터 인간은 융합적 하나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것은 성충동이 그런 것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핑크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라캉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고전적 시각을 특징짓는 환상은 더욱 심각하다. 그것은 […] 성교에 대한 이야기와 남녀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교한 은유들로 가득하다. 형상은 질료에 삽입되거나 그 안에 씨를 심는다; 형상은 능동적이고 질료는 수동적이다; 형상과 질료, 능동성과 수동성, 남성적 원칙과 여성적 원칙 사이에는 근본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 지식과 세상의 관계는 성교의 환상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브루스 핑크, 에크리 읽기, 265쪽)



이처럼 인간의 성충동은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에 의해 움직여왔습니다. 그런데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관계는 없다”


성관계는 없다란 말은 라깡이 던진 커다란 화두입니다. 성관계는 없고, 오직 비-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아주 간단히 말하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성관계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화두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성관계는 없지만 비-관계가 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관계지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지요. 하지만 라깡에 의하면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언어, 말하기는 혼자 즐길려고 하는 겁니다. 



“발달은 주인의 발달과 혼동될 수도 있지요. 여기서 음악을 듣듯이, 좋은 귀가 있다면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스승존재m’être이고, 나는 내 지배존재m’être를 통해 진보하며, 나는 그러한 우주의 자기존재m’être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듯, 말하자면 정복당한 여음 혹은 패배한 백치con-vaincu입니다. 우주는 레토릭의 꽃이지요. 이러한 문학적 에코가 우리의 이해에 도움을 줄 겁니다. 자아moi 또한 하나의 레토릭의 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꽃은 프로이트가 Lustprinzip이라고 부른 쾌락원칙의 항아리로부터 자라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쾌락원칙을 수다(blah-blah)에 의한 만족이라고 정의합니다.”

(자크 라깡, 세미나 20 : 앙코르, 5장 :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이트, 영역본과 일역본을 참조하여 번역) 



수다, 그것은 혼자서 마구 떠드는 것이지요. 남을 들러리로 세워놓고 중얼중얼, 그것이 말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최대의 즐거움이 됩니다.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위의 구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조이스와 까이유, 두 젊은 남자의 이름으로 보이는 것, 거기서 라깡이 이끌어내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 하나는 융합적 하나가 아닙니다. 라깡이 “성관계는 없다”에 연결되는 하나의 화두를 다시 던지는데요. 그것은 “일자가 있다”입니다. 



“이것은 그저 말하다가 아니라,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일자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이건 저번 년도의 세미나에서 표현한 것대로, 어떤 것이든 말한다는 것이었지요. 완전한 명제, <<성관계와 같은 것은 없다>>”

(자크 라깡, 세미나 19 : …더 나쁜(…ou pire)



성관계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관계는 없습니다. 환상이 있습니다만, 그것 또한 이름에 불과한 것일 뿐, 오직 비-관계만이 있습니다. 없는 것에 이름을 붙여야하니까 무언가 자꾸 말하게 됩니다. 섹스에 대해서, 성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게 됩니다.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명명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면 남는 것은 “말하는 존재”뿐입니다. 홀로 말하는 단독의 한 명, 말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만이 남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첫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Joyce le Symptôme à entendre comme Jésus la Caille 

증상 조이스는 Jésus la Caille와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c’est son nom. 

그것은 그의 이름이다. 

 

Pouvait-on s'attendre à autre chose d'emmoi : je nomme.

자아로부터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하였는가 : 나는 명명한다. 

 

Que ça fasse jeune homme est une retombée d'où je ne veux retirer qu'une seule chose.

그것ça(증상 조이스라는 이름)이 젊은 남자로 보이는 것, 그건 하나의 부차적인 효과(악영향, 낙하물, 진정)이며, 거기서 나는 오직 하나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C'est que nous sommes z'hommes.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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