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은 주체가 자기에 대해서 말하는 시간이다. 한 시간 가량을 온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주체에게 새로운 경험이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발화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환상이다. 자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뿐더러, 자기에 대해서, 자기 삶의 과정에 대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표현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분석과정은 오래 걸린다. 끝나지 않는 분석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다. 3년 이상을 분석하는 경우도 있으며, 주체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 1년 이상을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모두가 그렇게 긴 분석을 받아야 하는가? 분석의 기간은 주체마다 다르다. 그리고 분석의 효과 - 불안이 사라진다거나, 주체의 자각이 일어난다거나 - 는 의외로 빨리 나타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첫 회기가 끝나자마자 경험한 바 있다.
분석과정은 머뭇거림과 초조함, 때로는 흥분과 차분함 등이 교차되면서 다양한 역동이 오가는 작업이다. 침묵이 길어지기도 한다. 분석주체나, 분석가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경우도 있다. 이때 분석가는 적절한 질문을 던져서 침묵을 깰 수도, 아니면 같이 침묵을 지킬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분석과정에서 무의식의 주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점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은 무의식이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증자들과 대화함으로써 말이다.
대화, 그런 무의식의 욕망을 발화하는 말하기를 통해서 정신분석이 가능하다. 정신분석은 말하기 치료이다. 자기에 대해서 말한다. 타자에 대해서 말한다. 무엇이든 말한다. 주체는 말하고, 분석가는 듣는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구도이다. 분석가는 듣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한다. 분석가가 되기 위해서, 정신분석을 받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은 그 때문이다.
라캉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을 도입하여 인간을 설명한 이유는, 상상계-실재-상징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상상계-상징계-실재의 순서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상상계-실재-상징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셋은 하나이자 여럿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는 정신분석을 받아보아야 그 정확성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 분석을 받지 않은 자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론의 정합성이 떨어진다. 아버지가 상징계였다가, 상상계였다가 실재의 아버지도 있고, 대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대타자가 나타난다. 라캉은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가?
분석과정에 들어가면, 어떤 대상이든지, 주체의 심적현실에 영향을 끼친 대상은 상상계, 실재, 상징계 어디에서나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은 하나지만, 드러나는 형식은 다종다양하다. 어디에서나 출몰한다. 대상은, 무의식의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은 형체가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바로 대상a이다. 실체도 형상도 없으며, 언어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상a는 바로 공백이다.
모든 인간의 서사는 환상의 서사이며 자기가 구성해 낸 이야기이며, 그렇게 해서 욕망하게 된 형식 그 자체가 바로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는 그의 스타일 그 자체이다.
따라서 분석가는, 분석주체가 어떤 형식으로 말하는지, 그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욕망하는지를 듣는다. 그리고 무의식의 주체가 발화하는 지점을 기다린다. 이 과정에서 분석주체는, 스스로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의 삶을 구성해 왔던 환상의 서사가 진짜인지, 그리고 그가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확실한지를.
무력감에서 불가능으로. 이는 라캉이 네 가지 담화에서 말한 것이다. 요구하는 주체는 요구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을 자책한다. 그 결과 수치심이나 죄책감과 같은 정동을 느끼고 이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바,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분석과정을 통해 무의식의 주체가 원하는 욕망이란 불가능함에 대한 욕망이 된다. 불가능함을 욕망하는 것이라면, 주체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비워져 있던 삶의 조각, 흔적인 공백 그 자체를 욕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자기 삶의 서사를 재구성하게 된다. 새로운 서사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치료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물론 정신분석에서 목표는 치료가 아니다. 치료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주체 자체가 바뀌면, 주체 자체가 불가능을 욕망하게 되면, 치료는 덤으로 따라온다. 요구가 아닌 욕망으로, 무력이 아닌 불가능으로, 끝없는 요구로부터 공백에 대한 욕망으로 무의식의 주체가 위치하게 됨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