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조이스 3
이제 한 줄을 읽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증상 조이스는 구석구석 라깡의 수사학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음미하며 읽을만 합니다. 그렇게 읽다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지식이 아닌 욕망의 이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Pouvait-on s'attendre à autre chose d'emmoi : je nomme.
자아로부터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하였는가 : 나는 명명한다.
오가사와라 신야의 주석에 따르면, 프랑스어에서 “나 스스로”를 지칭하려면 보통 de moi라고 씁니다. 그런데 라깡은 “d’emmoi”라고 쓰고 있지요. 프랑스어 사전을 뒤져봐도 그런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가사와라 신야는 이것을 en moi라고 읽어, 초자아(surmoi)와의 연결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단어를 “자아”라고 읽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라깡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는 이미지입니다. 거울에 비춘 이미지, 그것을 토대로 인간은 “나”를 구성합니다만, 잘 생각해보면 거울에 비춘 이미지도 나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이미지도 결국은 타자(other)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진정한 “나”와는 간극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나”를 정립하기 위해서 “남”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미지를 상대가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곧 파괴충동으로 이어지겠지요. 그것이 상상계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라깡은 여기서 자아로부터 어떤 다른것, 즉 무언가를 기대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기대할만한 것이 없지요. 자아는 이미지로서, 그것은 이미 다른 것, 타자에 의해 정립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곧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라깡은 : 뒤에 “나는 명명nomination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명명은 앞서 살펴보았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아기에게, 부모가 “저것이 너란다!”라고 말하는 그 명명과 좀 다른 명명입니다.
이 명명은 바로 상상계, 상징계, 실재 세 개의 고리를 엮는 네 번째 고리, 생톰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입니다. 따라서 증상 조이스에서, 증상이라는 단어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상상계에서 이루어지는 “명명”은 타자의 명명입니다. 아기는 엄마나 아빠, 혹은 어른의 “명명”을 듣고 거울에 비친 영상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헤겔이라면 감각적 확신이라고 말했을 대목이군요.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감각적 확신이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므로, 진리가 아니며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듯이, 상상계 또한 이미지의 세계이며, 분열된 신체를 환영과 같은 이미지로 봉합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또한 그것이 타자의 명명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금 산산조각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이스는 뭔가 이상합니다. 조이스와 같은 사람들은 타자의 언어에 기초해서 “명명”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자기가 자기를 “명명”합니다!
여기서 잠시 우회해보도록 하지요.
라깡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있습니다. 코제브는 1930년대 파리에서 헤겔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강의의 필사본인 “헤겔 독해 입문”의 영향은 프랑스 철학사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그 강의는 “인간은 자기의식입니다”로 출발하여, 헤겔 철학에 있어서 죽음의 이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요. 라깡은 이 강의에서 깊은 영감을 받습니다. 그런데 헤겔 철학(절대정신의 자기전개로서의 역사철학)과 죽음의 이념. 물론 헤겔 철학에도 죽음의 문제가 거론되긴 합니다만, 뭔가가 독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신지요.
헤겔은 신학자 출신의 철학자이니만큼, 기독교적 사고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특히 헤겔의 변증법은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듯이 정-반-합의 전개과정이 아닌, 삼위일체론적인 전개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시간이 역전되기도 합니다. 헤겔의 철학은 인간의 사고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정신, 즉 주인공이 정신인 사고방식을 가집니다. 인간의 사고는 유한하지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니까요. 반면에 신적인 정신의 사고는 무한합니다. 따라서 헤겔철학을 절대정신의 자기전개 과정을 상술한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코제브는 꽤나 독특한 생각을 합니다. 헤겔이라는 사람은 어쨌든 인간이고, 헤겔이 서술한 나폴레옹 또한 인간입니다.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필멸적 존재인 인간이, 유한한 정신의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 무한한 정신의 사고로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라는 정신현상학의 이념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거기서 핵심을 자기의식, 자기가 자기를 의식하는 것에 무한한 정신으로 나아가는 핵심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코제브의 헤겔독해는 배후에 한 명이 더 숨어있는 해석이 됩니다. 그가 바로 하이데거입니다. 코제브는 헤겔과 하이데거를 총체적으로 엮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주저는 존재와 시간이지요. 즉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문제에 몰두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란 존재입니다. 존재란 지워진 존재, 무無라는 것입니다.
먼저 존재와 무 - 사르트르가 동명의 저서를 짓기도 했습니다만 - 의 개념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에도 이러한 개념이 있지요. 물론 본격화된 것은 헤겔입니다만, 헤겔은 존재와 무가 같은 차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있음과 없음이 같다는 것이지요. 또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유, 있음이 있는데, 그것이 개념적으로, 즉 그것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면 그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차원의 인식도 불가능한 그야말로 추상적인 무언가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지성활동이 개입하여, 그것을 분해하고 분석했을 때, 거기에 뭔가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행위가 개입하면 없음이 뭔가가 있는 것이 됩니다. 헤겔은 이걸 거꾸로 이야기하지요. 있는 것,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데, 그건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이라서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없는 것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여 그것을 무언가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무로부터의 생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헤겔의 이러한 있음과 없음의 변증법적 통일로서의 생성개념을 새롭게 사유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며 살아갑니다. 누가 어떤 직업이 돈을 잘번다더라, 하면 그 직업을 가져볼까?하고 관심을 가지지요. 한때 공무원이 되는 것이 열풍이었던 이유는, 정년이 보장될뿐더러,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있어 여가를 누리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살다보면, 공허한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Das Man 속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던 인간은, 기계장치와 마찬가지인 근대국가 시스템에서 +1로 계산됩니다. 여러 무리 중의 +1일 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1, 세상의 주류 의견과 반대되는 무언가의 결단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직업안정성이 곧 내 존재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삶의 전 과정 자체가 불안정성 그 자체이며, 그 불안정성을 이겨내며 자기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다…라고 외치며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해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은 여러 무리 중의 +1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자꾸 고정관념의 저 너머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결론을 내린 것일까요?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이러합니다. 인간이 현존재가 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때, 세상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주류, 모두의 의견, 전체의 의견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안의 심연으로 들어가 거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라깡은 그것을 무의식의 외침이라고 했겠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의 소리라고 합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존재가 외치고 있던 소리를 경청함으로써, 나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나가는 작업, 그 과정 자체, 그러한 동사적 작업 자체가 현존재의 실존적 결단이며, 거기로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류의 견해, 세상 사람들의 의견, 전체가 지향하는 목표로부터 벗어나서 내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 자체가, “무”가 되는 것, 은폐하는 것, 은닉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 무로부터 나만의 고유한 존재가 열린다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는, 즉 타자에게 의존하여 나를 규정하려고 하는 근거(grund)찾기로부터 벗어나(ab), abgrund, 존재의 심연abgrund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존재 그 자체가 있을 따름이며, 그 존재는 존재로서, 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1, 마이너스 일자로서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되며, 세상의 의견은 그 존재에 대해서 근거지을 수도, 규정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 근거지을 수 없는 무언가 없는 것이 하나 있는, 그러한 무의 사태로부터,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있게 만들어, 자기가 자기를 명명하는 사건을 통해서 다시금 새로운 삶의 발걸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명명하는 것, 헤겔도 말했던 바가 있습니다만, 자기의 목적, 지향점을 스스로 발명하여 살아내는 태도를 말합니다. 라깡은 이것을 절대적 차이의 확보라고 말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절대적 차이를 확보합니다.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는 증상과 동일시를 함으로써 말이지요. 이것은 분석가가 확보하는 절대적 차이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라깡이 보았을 때 정신분석 없이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자체가 놀라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을 썼을 것입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구멍을 구멍으로 남겨두지 않은 채, 스스로의 증상으로 그 존재의 구멍, 결여를 메워버리는 방법을 택합니다.
따라서 제임스 조이스의 글쓰기는 발병을 막는 글쓰기가 됩니다. 그의 정신병을 막는 것은 에크리튀르(글쓰기)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그는 증상과 동일시에 이르러 즐김으로써 발병을 틀어막아버립니다. 바로 무의식의 글쓰기인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무의식은 무의식이 아니게 되지요. 무의식은 억압되어 있어야 무의식인데, 그것이 드러나버리면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닙니다.
라깡은 제임스 조이스가 정신병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조이스는 글쓰기를 통해 발병을 틀어막았습니다. 이것은 증상, 즉 "생톰"이 상상, 상징, 실재를 묶는 "명명"의 기능을 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증상이 심리구조를 안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증상을 통해 나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통찰로도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