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와 수니온 곶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가 대한민국 영사관이 지정한 ‘한국인 여행자가 가지 말아야 할 우범지역’인 것을 전혀 몰랐다. 그런 걸 살펴야 한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 주변이 좀 산만하고 어지러웠고 낙서로 지저분했고, 노숙자 두어 명이 보였지만 도시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 아침 일찍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고소한 빵과 커피를 마시며 픽업 오기로 한 가이드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전혀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다. 유럽의 어디를 가더라도 소매치기를 주의해야 하는 건 상식. 호텔 프런트에서는 서너 블록 가면 생선 시장이 있고 건너편에는 과일 야채 시장이란다.
숙소가 우범지역 안에 있어 주의하라는 가이드의 말을 빼고는 전날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다. 물론 단독 차량 여행이어서 그랬겠지만. 우리는 수신기를 귀에 꽂고 넉넉하게 자리를 잡고, 가이드는 앞에서 운전을 하며 그리스 이야기를 엮어간다.
수천 개의 섬과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에게해, 이오니아 해, 지중해에 이르는 아름다운 해변과 해양성 기후의 그리스. 문명의 출발지로 유명한 나라이고, 고대 그리스는 서구의 철학, 과학, 정치, 사상, 예술의 기초를 형성했던 최초의 도시국가이다. 그리스의 지리적 위치는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를 잇는 위치에 있어, 다양한 외세의 영향과 충돌을 유발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터키와 관계는 현재까지도 외교적인 긴장요인으로 지적된다. 섬이 많은 그리스는 스스로 ‘바다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단다. 나라 전체가 13번이나 디폴트를 선언할 정도로 경제 상황은 좋지 않다. 유로 존에 들어 있어 유로가 통용 화폐이기는 하지만, 임금이 너무 낮고 청년 실업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 교육이 실시되는 나라.
옛날이야기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간다. 차 안에 있어서일까, 어제 같은 더위는 사라지고 도착 곳은 ‘사도바울의 교회’이다. 그리스 정교회 교회인 이곳에는 교회 초대 지도자들부터 쭈욱 나열돼 있었다. 반대쪽 대리석 판에는 고린도 전서 13장 108절(사랑장)이 헬라어로 기록돼 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작성했다는 설명. 로마나 피렌체에서 만났던 가톨릭 성당 과는 비교가 안되게 소박한 실내를 둘러보고 가톨릭 신자로서 느끼는 바가 있지만 여기서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기회가 되면 주교님이나 연륜이 오래된 신부님께 물어볼까 한다. 아담한 정원과 본당 앞에서 인증샷 하나.
계속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곳은 고린도 운하. 지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6.34KM의 인공 운하. 우리들 반응은 ‘겨우 이거? 이렇게 좁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유럽여행에서 다뉴브 강을 따라 리버 크루즈를 타며 만났던 운하들에 비하면 턱없이 가늘고 짧았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가이드가 웃는다.
고린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진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여정. 고린도에서 바울은 천막 제조 업자 부부를 만나 생업을 유지하면서 복음 말씀을 전할 수 있어, 대중에게는 더 큰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되었단다. 하느님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으로 네 사명을 다하라’는 말을 전달받았고, 그 실천을 위해 평생을 받쳤던, 순교로 신앙을 증거 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매주 사도 바울이 설교를 했다는 곳은 상가 중심지에 위치한 작은 돌 단상이다. 비마(Bema) 광장이라 불린다. 잠시 생업을 쉬고, 그의 단상 설교를 들으며 마음의 위안을 받았을 고대 그리스인들을 상상해 본다. 아고라 시장이라는 상가의 잔해들은 꽤 넓고 크다. 이후 여기에는 고린도 초대교회가 지어졌다고 하나 지진으로 그 모습은 사라지고 계단 부분만 남아 그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의 가이드는 선교를 위해 한국에서 그리스로 파견되었고, 이후 거의 30여 년간 그리스에서 살고 있단다. 어쩌면 가이드라는 생업을 통해 선교를 실천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개인 적인 이야기들도 섞어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던 그리스살이. 이민자의 삶이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듣늗다. 두어 시간 달리자 고린도 유적지와 박물관이 나온다.
구고린도는 그리스 남북 육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 고린도 돌산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다. 신전 안에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 여사제들은 신전을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매춘 행위를 했단다. 음행이 제사로 포장되어 공공연히 행하여졌던 곳에서, 사도바울은 의연히 전도 생활을 하며 음탕한 교인들을 꾸짖었고,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남겼다. 그의 전도여행이 후대에까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터. 흩어진 돌들과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적지를 만나며 도시의 과거는 화려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남겨진 잔재들은 소박하다.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유적, 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전할 수 없어 아쉽다. 어쩌면 이것이 여행자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알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면 다 똑같은 유적으로만 보이는 것.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프로디테 신전이 올려다 보이는 해협의 이름은 코린트만. 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곳에서 잠시 쉬고 다음 도착한 곳은 역사박물관. 로마나 피렌체 박물관보다는 그 규모가 작지만 나름 잘 정돈돼 있다. 그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조각상들. 로마시대의 유품들인 코린도식 도자기들이 많다. 기원전 7-8세기에 만들어졌단다. 항아리엔 동물들과 상상 속 신들의 모습과 식물들이 그려져 있다. 앞뜰에 전시돼 있던 목이 잘린 조각상들. 전쟁의 폐해를 보여준다. 니케(Nike) 여신상. 전쟁이나 경기의 승리의 여신으로 불리는 조각품도 만난다.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지고 우린 그 앞에서 인증샷 하나 남기며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이드가 미리 예약해 둔 지중해식 레스토랑에서 편안한 점심 식사를 하고, 수니온 곶으로 이동. 돌산 옆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 그 끝에 있는 해엽. 포세이돈 신전을 오르지 않을 거면 올 이유가 없는 곳, 수니온 곶. 신전이 멀리 보이는 입구에 차는 세웠고, 일단 목을 축이기 위해 카페에 줄을 섰다. 더위와 바람 때문에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돌 언덕에는 돌개바람이 몹시 분다. 모자는 물론이고 사람이 날려갈 것 같다. 물론 나의 몸무게가 날 지탱해 주겠지만 한발 내 딛기도 힘든 상황. 멀리 포세이돈 신전을 뒤로하고 화면을 최대한 당겨서 인증샷 하나 남기고 철수하기로 결정. 가이드는 우리의 결정이 못내 아쉬운 듯했지만 우린, 우리들의 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노을 맛집이라는 포세이돈 신전의 언덕에서 노을을 기다리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해가 중천에 있는 지중해를 바라보며 입구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며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본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그가 왜 하필 이 해엽에서 머물렀을까? 바람과 싸우며 어부들을 구했을까, 그의 심볼인 삼지창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풍랑을 만들어 그의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이 있으면 무서운 벌을 주었을까? 그 옛날, 고등학교 때 읽었던 그리스 신화의 부분들을 애써 기억해 낸다. 포세이돈. 제우스만큼 힘이 셌고, 삼지창을 들고 있거나, 말로 변해 대지를 흔들며 달리는 신. 제우스와 형제이며 많은 여성 편력을 갖었던 바다의 신. 대지에서는 말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제우스에 맞서는 장면이나, 대지를 흔드는 장면, 거대한 풍랑을 일으키는 장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무력의 상징. 그의 힘을 돌개바람이 일었던 수니온 곶에 부려 두고 숙소로 돌아온다. 가이드는 방대한 량의 그리스 신화를 들려 주었다. 들을 땐 이해하고, 알것 같고, 기억 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연기가 사라지듯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날의 메모를 바탕으로 겨우 요만큼 옮겨 오는 것이 내 능력의 한계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시 읽어 볼 수도 있고, 너뷰트에 떠도는 영상들을 찾아 기억을 더듬어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시간이 허락하는 그날로 미루어 둔다.
숙소에 도착해 저녁을 먹을 시간.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막 무가내로 앞서간다. 가이드의 경고를 무시한 채 우린 몇 블록을 걸어갔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로 전날 보았던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근사한 식당과 카페들. 생음악이 연주되는 곳도 있었지만, 조금 조용해 보이는 곳으로 찾아들어갔다. 식당 이름을 딴 와인까지 있는 걸로 봐서 꽤 괜찮은 식당인 것 같다. 그리스 음식과 와인을 곁들인 근사한 식사. 우아하게 하루를 마무리 지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범지역에 대한 염려는 사라졌고, 또 다른 그리스가 다음날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며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놓는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그리스 전통 악기, 부주키(Bouzouki) 연주. 만달린 같은 청량한 음이 통통 튀듯, 창 밖으로 지나간다. 그리스의 역사는 이 어두운 밤처럼 지고 있어도, 누군가 이야기를 지켜가는 사람들은 현악의 청아함이 되어 여행객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내일은 또 어떤 그리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