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Delphi) 1일 투어
3일째 똑같은 빵집에서 커피와 갓 구운 고소한 빵으로 아침을 맞는다. 며칠 째 만났다고, 반가운 얼굴로 주인이 묻는다. ‘여기엔 며칠이나 머물 거냐? 다음은 어디로 가느냐?’고. 내일까지 있을 거고, 오늘은 델피 관광을 하고, 내일은 이스탄불로 간다고 답했다. 주인의 얼굴이 확 바뀐다. ‘터키문화는 원래 우리 거였는데, 전부 약탈해 간 거다.’ 아차 싶었다.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좋지 않다는 설명을 그새 잊어버리고, 무심결에 답을 했더니. 그렇다면 대영 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등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지나갔지만, 그녀의 설명이 길어지자 ‘쏘, 쏘리’하면서 웃음으로 무마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시 가이드를 만나고, 차에 오른다. 처음 갈 곳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Archeological Museum of Delphi). 다양한 형태의 청동 인형들, 기원전 900-700년경 유물들이라고 한다. 점토 인형들도 꽤 많았는데, 주로 여성의 모습들이었고 작은 소품들이었다. 거대한 청동 솥도 있었는데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봉헌된 것으로 신에게 바치는 물건이 얼마나 중요하고 정교한지 보여 준단다. 박물관의 대표 유물 중의 하나인 아르고스의 쌍둥이(Twin of Argos). 이 작품에 대한 신화는 두 형제의 어머니는 헤라의 사제였는데, 신전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갈 소가 늦어지자 두 형제가 직접 수레를 끌고 신전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헤라 신은 두 형제의 효심에 감동하여 무슨 축복을 내려 줄까 물어보았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평화로운 잠을 달라고 소원했다. 그래서 이 두 아들들은 신전에서 잠들었단다. 엷은 미소를 띤 두 형제. 훗날, 형제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조각상이 만들어져 봉헌 됐단다.채색된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파편들은 당시의 문양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낙소스의 스핑크스(Sphinx of Naxos), 기원전 560년 경 에게해의 낙소스 섬사람들이 아폴론 신에게 바친 조각물. 스핑크스는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 새의 날개를 가진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동물로 지혜의 상징이었단다. 많은 유물들이 있었지만 황금과 상아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고대 그리스의 뛰어난 공예 기술을 보여주며 봉헌물이 얼마나 값 비싸고 귀중한 것들이었지 증명해 준다. 뿐만 아니라 아폴론 신전의 공예물 파편들도 많이 전시돼 있었다. 신전을 장식했던 말의 조각상, 여인의 조각상 등등 그야말로 유물들은 무궁무진했다.
또 하나 중요하다며, 알려 준 것은 붉은 그림 킬릭스(Red-figure Kylix).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전으로 참배하러 온 모습을 그릇에 붉은색으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정교한 여인의 모습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몇 천년의 세월조차 거스를 수 없는 그리스로마 신화. 구전동화가 되고, 책이 되고, 만화가 되고, 애니메이션이 되어 세계인들에게 전해진다. 이야기를 찾아오는 여행객들, 확인되는 사실들에 놀라고, 신기해하고, 다시 이야기들을 기억해 본다.
유물들은 계속 이어진다. ‘델피의 전차 기수(Charioteer of Delphi). 기원전 470년 경에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전차경주에서 우승한 기수를 묘사했단다. 조각의 눈은 보석과 상아로 마감되었고 섬세한 표정이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얼마나 더 많은 유물들을 보았을까. 막힘없이 이어지는 설명들.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음 가는 곳은 델피 유적지(Archaeological site of Delphi).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탁을 받기 위해 걸었던 신성한 길(Sacred Way). 길을 따라 올라가면 파르나소스 산(Mt. Parnassus)의 웅장한 풍경과 델피 유적지를 볼 수 있다. 늘어선 오래된 기둥들은 당시 건축물들의 상징이다.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돌무더기들을 볼 수 있는데, 보물 창고의 유적들이라고 한다.
그러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있다. 커다란 돌덩이 앞에서 모두들 인증샷을 찍는다. 옴파로스(Omphalos),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곳이란다. 지구의 배꼽이 왜 이곳에?라는 의문.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델피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란다. 델피는 제우스가 세상의 중심지를 찾기 위해 동시에 독수리를 날렸는데 그 두 마리가 만난 곳이며, 이 돌은 아폴론 신전 부근 정확한 위치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박물관 안에서 보았던 옴파로스가 진품이고 이 돌은 복제품이란다. 그래도 세상의 배꼽 앞에 섰으니 인증샷 하나는 남겨야겠지?
고대 그리스시대에 델피는 신탁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과 큰 성공을 거둔 도시 국가들이 봉헌을 바치던 장소였다. 이런 봉헌물들의 조각들이 도시 전체에 펼쳐져 있다. 어디를 파도 유물이 나오는 도시. 세계의 배꼽이라고 불렸던 도시에서 신화와 함께하는 기를 받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고대 극장(Ancient Theatre)으로 올라간다. 35개의 좌석 줄, 객석은 5000 정도. 파르나소스 산의 자연 경사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연극도 상영하고, 아폴론을 기리는 음악 및 경연대회를 개최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에도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할 만큼 보존이 가장 잘된 원형극장이다. 다시 돌아 내려오는 길, 파르나소스 산과 어울리는 유적들의 돌무더기들. 성곽들. 많은 방문객의 발길로 반들 반들 닳아진 돌길 들. 고대 그리스의 영화는 그렇게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닳아지고 있었다.
이어 작은 도시, 아라초바(Arachova)에 들렸다. 파르나소스 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도시 전체의 전망이 빼어나 산기슭의 보석이라 불린단다. 델피에 들리는 여행객들은 꼭 한 번씩 들려 보는 동화 같은 마을. 마을 중심에 있는 시계탑이 유명하다. 계단을 오르는데 바람이 엄청 분다. 산세와 어우러지는 유럽식 주홍색의 지붕들이 색감 화려한 유화 같은 마을. 거리는 경사가 많고, 인적은 드물었다. 주말 관광객이나 겨울 철이면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는 곳. 그리스의 예쁜 동화마을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녁 걱정을 한다. 말 그대로 ‘오늘 뭐 먹지?’ ‘혹시, 아시안 마켓 좀 들리면 안 되나요? 사발면 파는데 없을까요?’ 나의 한마디에, 모두들 너무 좋아한다. ‘그러죠’ 단독 차량 투어를 하는 이점은 이런데 있는 것 아닐까? 필요한 곳에 들릴 수도 있고, 전날처럼 바람이 너무 불면 예정돼 있던 곳을 안 갈 수도 있고.. 등등.
그야말로 우범지역 같은 곳에 차를 세운다. 가게로 들어가는 좁은 문. 안쪽의 선반에서 신라면 사발면을 찾았다. 딱 6개. 다른 먹거리들도 사고 싶었지만 다음날 그리스를 떠나야 하는 일정이었으므로 생략하기로. 며칠째 부드러운 지중해 음식만 먹었던 우리는 속을 확 풀어줄 한방이 필요했다. 커피 팟에 뜨거운 물을 끓이고 사발면에 물을 붓고 기다린다. 라면 냄새가, 이렇게 신날 일인가? 웃으며, 나무 젓가락으로 면 발을 올린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알아듯지 못하는 그리스어 티브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몇일의 피로가 신라면 한방으로 해결되었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