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은달 Apr 26. 2024

2023년 2월 16일의 단상

오늘의 삼시 세 끼는 모두 삼각김밥이었다.

나는 나의 생활이 모두 과잉되어 있다고 느낀다. 영양이 과잉하고, 에너지가 과잉하고, 편리가 과잉하다. 난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음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편리함에 대한 욕망을 삭제하고, 최대한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아침에는 셸리 케이건 교수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읽었다. 죽음 이후의 삶, 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삶이 완전히 끝난 것을 죽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삶이 끝난 이후에도 삶이 있을 거라 믿는다. 대체 얼마나 살고 싶은 걸까? 도대체 얼마나 죽기가 싫으면 죽음 이후에도 세상이 있을 거라 믿는 걸까? 인간의 본질이 육체뿐이든 육체와 정신의 합체든 그런 건 상관없다. 죽었다면 어쨌든 끝이다. 그러므로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 삶은 지금 뿐이다. 영혼이 사는 세상 같은 헛소리에 전도되지 말고, 속세를 사는 몸을 가지고 내세를 운운할 것이 못된다.


회사에서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정신이 육체에 깃들어 있지 않으니 기억도 없다. 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일만 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조카가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을 갔다 왔다고 들었다. 한 살 때부터 조직에 소속되어야 한다니, 아기의 삶도 쉽지 않다.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그만큼의 불행을 준다. 억압받지 않아도 자유가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가족들과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방금까지 죽겠다고 했던 내가 흐릿해진다. 그러나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 둘 점멸해가면 결국 남는 것은 또다시 나 혼자다. 혼자. 이 권태로움에 구역질을 하는 사람 한 명, 무의미한 인생에 몸부림치는 하나의 육체, 고통스러운 삶에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신음하는 영혼 하나. 그것은 전체의 나고 또 부분의 나다. 결국 나, 단 한 명이다.


목요일이 되면 벌써부터 몸이 반죽처럼 늘어진다. 나는 건강한 편이지만 체력이 없다. 지구력이 없는 건지 인내심이 없는 건지 어쨌든 뭐가 없다. 불평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불평한다. 그나마 나아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구제의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발 이렇게 해달라고, 제발 저렇게 해달라고 나는 참 지겹도록 신에게 찡찡거렸다. 난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 신에게 바라는 구원이 없다. 신이 나에게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걸 안다. 신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나도 신에게 필요를 바라지 않는다. 신은 그냥 존재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진대도 항거하지 않는다. 텅 빈 눈으로 살아도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공갈빵도 빵이고, 단팥빵도 빵이다. 배고플 때 먹으면 다 똑같은 빵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2023년 2월 18일의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