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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 Jul 23. 2021

처방전 : 에세이 쓰기

나는 왜 에세이를 쓰려하는가

   막연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에세이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8주간 매주 한 편의 에세이를 쓰는 과제가 있었는데, 마지막에는  상징이 담긴 글을 써야 했다. 주제를 보자마자 예전에 썼던  난(蘭) 이야기가 생각났다. 추운 베란다에서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낸 난을 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외롭게 성장했던 나를 보는 것 같다 적은 습작이었다. 차마 열 줄이 안 되는 짧은 글을 읽고선 이런저런 살을 덧붙이며 한참을 울었다. 이미 전부 지난 일들, 이젠 색이 바랠 대로 다 바란 감정들을 다시 선명하게 칠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졌다. 대체 왜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던 걸까.   


  나에게 글쓰기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운명적인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 빼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그래도 굳이 주말마다 수업을 듣고, 퇴근 후에 피곤한 몸을 이끌어 돈과 시간을 들이는 것은 분명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글에 담아내기 시작했던 건 2017년이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놀고먹으니 일상이 꽤나 무료했다. 그때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짧은 일기들을 남겼었다.   


  그 무렵의 나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신경정신과를 다녔고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들었다. 매일 쌓여만 가는 업무로 인해 소진이 된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원하는 바가 있어도 떼 한번 쓰지 않고 지레 포기해버리는, 어른들 눈에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애어른이었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러온 많은 것들이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과로를 핑계로 제대로 탈이 난 것이었다.  


  어딘가에는 나의 날 선 감정들을 제대로 분출하고 싶었다. 어리고 유치하고 미성숙한 생각들을 불편할 만큼 직설적으로 써 내려갔다. 내 글이 읽기 불편하면 나를 언팔하시라는 한 줄을 덧붙이며 글을 남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읽기 좋은 보송보송한 글을 쓰는 재주는 없다) 그 글들은 소재들도 날 선 감정만큼이나 민감한 것 투성이었다. 거기에 아버지의 부재, 할머니의 편애, 엄마의 무관심 따위를 곁들여 담아냈다.   


  그때 어설프게 정제되지 않은 글을 써내던 것이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50번째의 짧을 글을 쓸 쯤에는 약을 거의 먹지 않았다. 약을 완전히 끊은 후론 한동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요즘 다시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어쩌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다기보다 토해내지 못하는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표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에게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냐 물으면 일 하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에 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직 애어른의 습관이 남아있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다. 입 밖으론 그럴싸한 얘기들만 꺼내놓곤 하는데 그래도 손은 좀 더 거침이 없다. 사실 나의 글쓰기에 대의명분 따위는 없다. 나는 그저 내 감정을 제대로 토해낼 창구를 만들어 놓고 싶을 뿐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위한 에세이 쓰기를 처방한다. 오늘 미처 내보이지 못한 감정들을 꾹꾹 눌러써둔다. 이 처방전들을 차곡차곡 모아 언젠간 그럴싸한 수필집을 꼭 내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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