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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 Jan 01. 2024

연말음식: 김치수제비

2023년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기분이 심드렁하다. 연말연시라고 설레어 본 적이 언제였나, 해가 갈수록 감흥이 적어진다.

      

그래도 올해 업보는 다 청산하고 개운하게 새해를 맞겠노라 이제껏 피해왔던 일들을 직면한다. 교통사고처럼 왔다가 후유증만 남기고 간 그에게 미련을 한껏 담아 새해 복을 빌어주고, 나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던 상사에게도 슬쩍 새해 문안 인사를 드린다. 할머니 돌아가시는 길에 안 좋은 꼴만 실컷 보고 나서 한동안 인사 나누지 않았던 친척 어른들께도 먼저 연락을 드려본다. 괴로움은 다 자신의 마음이 만드는 거라는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올해 그 많던 일들에도 다 배울 점이 있었겠거니 하며 12월 31일의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도 아직 남은 감정을 분출하고 싶다. 날씨도 쌀쌀한데 얼큰하고 따듯한 국물 요리도 먹고 싶다. 무언가 씹는 맛을 느끼고 싶다. 식욕에 감정을 담아본다. 칼칼한 김치 수제비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 생겼다.

      

밀가루에 물과 소금을 넣고 손으로 반죽한다. 수제비를 쫄깃쫄깃하게 만들려면 반죽부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오늘의 감정을 활용해 본다. 오늘의 심드렁한 기분을 담아, 미처 못 털어낸 미련을 담아, 괴로움을 주는 상사를 생각하며 힘껏 밀가루를 주무른다. 어느 정도 반죽이 되었다 싶으면 냉장고에 넣어 숙성을 시킨다. 반죽에 담긴 내 감정도 더 쫄깃해져라. 오늘 다 소화시켜 버리게.


냄비에는 똥 딴 멸치를 담아 육수를 끓인다. 멸치에게서 모든 맛을 다 우려내 국물에 녹여내야지. 아무 맛도 남지 않은 멸치를 건져내며, 남아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올해 다 풀어내고 가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치를 송송, 감자와 호박을 서걱서걱 썰어내며 맛을 더해줄 재료들을 준비한다. 올해 안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나쁜 것만 기억하고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즐거웠던 여행도, 직장에서의 성취도,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도 많이 남겼는데 말이다. 항상 수제비를 만들어 먹을 때면 다른 것들은 남겨두고 밀가루 반죽만 다 건져 먹곤 했었는데 오늘은 야채도 남기지 말겠노라 생각하며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둔다

     

밑작업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수제비를 만든다. 김치와 야채를 볶다가 국물을 만들고, 끓는 국물에 지난 시간들을 떼어낸다. 맛있게 익어라. 쫄깃해져라. 나는 올해 마지막 날을 소박하게 너와 함께하련다.

 

완성된 수제비를 담아 먹기 시작한다. 한입에 남은 감정을 씹어 내고 다음 입에 즐거웠던 기억을 맛본다. 내년엔 좋은 맛을 더 많이 느껴보자 생각하며 어느새 수제비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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