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똥바람을 조심하세요.
초겨울 어느 날, 택배 박스를 버리기 위해 분리수거장으로 나갔다. 슬리퍼에 잠옷 차림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엄청나게 무거운 바람이 내 몸을 밀어내는 거다. 순간 그 힘을 몸이 받아내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다행히 발걸음을 빨리해 넘어지지 않았지만 와, 하마터면 코 깨질 뻔했다.
놀란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여긴 바람이 미쳤다. 방금 내 몸뚱이가 날아갈 뻔했다.’니까 돌아오는 반응은, ‘그래, 네가 5킬로만 더 날씬했으면 하늘을 날아다녔겠네.’였다. 억울한 마음에 옆에 세워진 매트리스도 넘어갈 뻔했다고 한참을 설명했지만, 전화는 ‘양심 잘 챙기고 살라.’는 덕담으로 끝났다. 나중에 그녀가 집들이를 온 날, 바람에 휘청거리며 말했다. ‘아쉽다. 5킬로만 날씬했었어도. 라이트 형제 찍었겠네.’
양강지풍. 소싯적 한국지리를 좀 했다면 들어봤을 법한 단어다. 강원도 양양과 강릉 사이에서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지리적으로 좀 더 좁게 ‘양간지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양양과 고성의 간성 사이를 부는 바람으로 소위, 이곳 사람들은 ‘고성 똥바람’이라 부른다. 이 고성 똥바람은 가끔 실제로 사람이 똑바로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불곤 한다. 초속 15m 이상의 바람을 태풍으로 분류하는데, 몇 년 전 어느 날, 고성에 초속 20m에 가까운 바람이 불었다.
4월의 어느 날 오후 7시를 조금 넘은 시간, 한 주유소 앞 전신주 개폐기에서 불씨가 일었다. 그 불씨는 초속 약 20m의 바람을 타고 산으로 날았다. 산으로 옮겨붙은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그 불씨들은 또다시 바람을 타고 산 주변 인근 마을로 퍼지기 시작했다. 민간의 전기 공급이 끊겼고, 4천 명 이상이 대피소로 향했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불씨는 바람을 타고 속초와 양양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방 호스의 물줄기의 방향마저 꺾어버리는 강력한 바람 때문에 진압은 더욱 늦어졌다. 결국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되었고, 전국에서 헬기, 진압 인력, 소방차들이 줄지어 고성으로 올라왔다. 영동지역 주민 모두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날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불은 진화되었지만, 황폐화된 거처와 산림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 날로 인해 생계를 잃으신 분들도 적지 않다. 2년이 지난 아직도 고성, 속초 곳곳에 그날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내가 고성에 온 것은 이 화재 이후이다. 그래서 몇 달간 고성, 속초, 양양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화재 흔적들이 안타깝다는 생각만 할 뿐, 내가 그 위험 지역에 와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간절기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집에서 얼른 맥주를 하나 가지고 나와 해변가 한 곳에 자리 잡았다. 노을 지는 해변가 곳곳엔 먼저 자리 잡은 관광객들이 꽤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마치 나도 관광객인 것 마냥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주변에선 이른 폭죽놀이도 시작됐다. 이런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낯선 소리가 해변가에 울려 퍼졌다.
해변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핸드폰에 재난문자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코로나 전이라서 단체 재난문자에 익숙하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무슨 영화 엑시트같다.ㅋㅋ’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보니, 인근 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문자였다. 아 그렇구나. 해변가의 모두가 다시 각자의 낭만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죽놀이를 감상했다. 그런데 해변가 앞 주택에서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나오시더니 소리치셨다.
“불났다는데 여기서 불을 터트리고 있어 미친놈들아!”
이윽고 해변가의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영화처럼, 재난문자 알림이 뒤이어 울렸다. ‘ㅇㅇ면 주민들은 즉시 인근 초등학교로 대피해 주십시오.’ 이제서야 사람들은 이곳이 작년의 대형 화재가 일어난 곳이란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들 자리를 접고 차로 펜션으로 뛰었다.
나는 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귀중품들과 옷을 챙겼다. 남자친구가 오고 있었다. 짐을 챙겨 문을 나왔다. 아파트 복도에선 에어비앤비로 놀러 온 것 같은 여대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호스트와 통화하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불난 곳이 보인다니까요?!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하냐고요!"
그녀의 말처럼 아파트 창 너머로는 길 바로 건너 산이 불타고 있는 게 보였다. 옆집 사시는 아주머니는 풍향계로 바람을 체크하고 계셨다. 옆에 가 괜찮은 것이냐 물어보니, 풍향이 작년과는 다르긴 하나 일단은 본인들도 대피한다는 것이다. 나도 남자친구와 함께 속초로 대피했다.
대피길에 본 광경들은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길목의 주유소 사장님들은 기름통들 위에 대형 호스로 물을 뿌려 대고 있었다. 머리 위 하늘엔 헬기가 날아갔고, 올라가는 소방차가 줄을 이었다. 가족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 다시 고성으로 올라가는 차들도 있었다. 인근 대피소로 빠지는 길엔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 뒤엔 불타고 있는 산이 마을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작년 화재의 끔찍함을 끊임없이 들추며 대피 주민들을 더욱 겁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약한 바람 덕에 산불은 작년에 비해 아주 경미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압됐다. 단 반나절의 재난상황이었지만, 그걸 바로 내가 겪었다는 사실에 당분간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나, 다시 고성 똥바람이 기승을 부릴 계절이 돌아왔다. 고성의 크고 작은 길목엔 산불조심 깃발과 팻말들이 올해도 자리를 잡았다. 아름다움이 가까이 있는 만큼, 자연의 재난도 멀리 있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 고성은 단풍시즌으로 들어섰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이 아름다운 고성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찾는 이 모두가 조심, 또 조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