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이라 생각하고 언제든지 놀러 오너라.”
전에 교토에서 교생실습할 때, 교감 선생님이 해 주신 말이다. 나는 작은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졸업했을 뿐인데, 그 후 큰 학교 못지않은 안정감을 얻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쉽게 기죽지 않았다. 그것은 교토에서 사랑받았기 때문이리라. 주님의 큰 사랑과 같이, 교토에는 나의 성장 기록이 많다.
오월 어느 날, 교토에서 오랜 친구 T를 만났다. T는 섬유공예를 전공해 예술적 센스가 있는 친구이다. 우리는 20살 무렵, 고베 지진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만났다. 그런데 T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약속 장소에서 잘 못 만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같이 갔던 롯데리아가 있어서, 거기서 만나자고 하면, 그녀는 자기 집 앞 롯데리아에서 기다린 적이 있고, 그런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넌 왜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주니?”
나의 이런 말에 T는 놀라,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해 준 친구는 May 네가 처음이야.”
교토 사람은 이 정도로 남에 대해 얘기를 해 주지 않나 보다. T는 교토 사람으로 예술가의 기질이 있어 남다른 면이 있지만, 이런 점이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였다고 했고, 그 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T는 원래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성이 ‘박 朴’인 할아버지 대 代에 일본에 와서 자기는 3세라 했다. 재일교포라고 하기엔 교토 토박이이지만, 이런 점을 숨기고 싶어 그동안 콤플렉스가 됐단다. 이 문제는 본인한테는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울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나를 통해 알았고, 자랑스럽다고. 그리고 그동안 숨겼던 이 일을 다른 일본인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았단다. 나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을 만큼, 그녀는 일본 전통의 섬유공예를 하는 일본인이라 여겨졌었는데, 그래도 역시 다른 일본인과 다른 하나가 정이 많다는 것이다. 오래 지내다 보니 박 씨 특유의 성실함과 정의로움에 영혼은 한국인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코로나로 몇 년 만에 만난 T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T는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아이들이 갖고 있는 불편한 점으로 신경을 많이 썼다. 전에는 ‘재일교포’라는 것으로, 지금은 아들들의 장래를 지원하는 소수 엄마의 입장이라 했다. 유럽에서도 마스크를 안 쓴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내용보다 T다움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T의 모든 것을 아껴주고 싶다. 비록 지금은 한국과 일본으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T와의 오랜 우정은 친구의 모든 면이 풍경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