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하다 보면 누군가 내 말을 가로채는 사람이 있다. 내 말이 아직 진행 중인데 말이다.
단둘의 대화보다 다수와 대화일 때 더 빈번하게 생긴다. 분위기가 묘해지는 순간이다. 기분이 살짝 나쁘기도 하고, 내 의견의 미완성이 찝찝하기도 하다. 내가 존중받지 못한 것 같아 민망한 마음도 든다. 그러니 중간에 끼어든 사람에게 자연스레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
내 말이 공중분해되는 것, 정상이다. 친목의 자리에서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일상 대화라는 것이 주제가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긴장감 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자리라면 이런 일은 더 빈번하다. 잘 듣다가도 어떤 특별한 관심사가 눈앞에 나타나거나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뜩일 수 있다. 당신도 그런 경험 있을 것이다. 무심결에 머릿속 생각이 툭 튀어나오는 순간.
말을 가로챈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도화선이 되어 어떤 생각이 불쑥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흐르는 과정이다.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 그게 친목 대화의 형식이다.
꼭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는 사람이 있다. 주제는 이미 냇가를 지나 강으로 흘러 바다까지 도달했는데 다시 출발 지점으로 회기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야말로 분위기 흐름을 깨는 끼어들기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어색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당신이 꽤나 고집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끼어들 틈을 호시탐탐 누리고 있었겠구나 생각도 든다. 경험 상 회기 된 이야기는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참고 들어주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마음 한 귀퉁이에 피는 생각, ‘이 사람이랑 대화하기 부담스럽다.’
흐지부지 대화미학, 오히려 편하다.
인생이 그렇듯 대화도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끝맺음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두는 게 더 자연스럽고 멋지다. 내가 매듭짓지 못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당신의 이야기는 더 풍성한 대화로 이어지는 바통 역할이 된 거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는 춤과 같다. 때론 리드하고, 때론 따라가고. 박자를 놓쳤다고 춤을 멈추지 않듯이 대화도 마찬가지다. 흐름을 타고 즐기자. 가끔은 미완성으로 끝나는 내 이야기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나를 배려하는 거다. 또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 배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화 예절은 생각의 자유의지를 꺾고 자제할 것을 강요한다.
어쩌면 배려의 탈을 쓴 족쇄일 수도 있다.
‘남의 말에 끼어들지 마라’,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해라.’
내 말이 매듭짓기 전에 씹히면 권한 침해 당한 것처럼 매달리게 된다.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의 마음, 바로 이런 손해를 본듯한 감정 때문이다.
듣는 게 편한 사람이 있고 말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있다. 듣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말하라 강요하면 불편할 것이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을 닫으라 하면 그 또한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법칙에 맡기는 게 어떨까? 말을 독점하는 사람이 힘들면 듣기 싫은 사람이 빠질 것이다. 말하기가 힘든 사람에게 자꾸 말하기를 강요하면 그 자리를 피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자신의 생존을 위해 환경을 선택하고 최적화시켜 나간다. 본능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를 만들어 갈 것이다.
대화의 흐름, 규칙을 두는 것이 더 불편할 수 있다. 내 말이 씹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타인의 말에 영감을 얻어 번뜩이는 생각을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대화가 삼천포로 흐르는 것, 원래 친목 대화는 그런 거다. 흐지부지 흐르게 두는 것 그게 친목 대화의 규칙이다. 진짜 그게 규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