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안.. 그거 어떻게 쓰는건데
생각해 보니 항상 블로그를 시작하면 일상 이야기나 리뷰를 쓰곤 했는데 내 직업에 관련된 블로그를 시작한 건 처음이다. 그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다.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같은 과 후배가 "마케터가 되고 싶어서 취업 준비를 하고있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하자니 막막하다."라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
그리고 그 말에 엄청나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지난날의 내가 생각나서.
누구나 그렇듯, 첫 취업 후 '실무'에 부딪히면 상당히 당황스럽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를 알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상사가 스스로 판단하는 기분이랄까. 이제 입사한지 막 일주일 된 나에게 콘텐츠 기획안은 이런 식으로 쓰는 거야- 하며 예시를 보여주고 써보라는 형식이 아닌, "이번 기획안은 네가 써봐." 하고 미션을 준 후 뒤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쓰냐고요.
회사 by 회사, 콘텐츠 by 콘텐츠지만 우선 레퍼런스를 많이 찾고, 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어느 정도의 수준이냐면 아이디어 회의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영상인데, 똑같은 구도에서 컬러만 계속 바뀌는듯한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특정 브랜드의 특정 콘텐츠가 바로 생각나서 공유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건 시간과 관심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특히 한번 발행되는 단발성 콘텐츠나 시리즈로 발행될 예정이라 그 방향을 잡아야 할 때는 엄청난 양의 레퍼런스가 필요한데. 그건 콘텐츠 마케터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에게도 꼭 필요하기 때문.
내가 어떤 디자인의 느낌을 원하는지를 3장 분량의 보고서로 디자이너에게 설명하는 것 보다
3장의 레퍼런스를 보여주는 것이 빠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콘텐츠 기획의 목적과 방향성 등을 명시해 주는 것은 온전히 마케터의 몫이다.)
이것도 케바케지만 3개 회사를 거치며, MS 파워포인트 혹은 구글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기획안을 늘 작성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콘텐츠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함께 들어가기도 하고 일러스트가 들어가기도 한다. 디자이너가 보기도 더 편할 테고- (그리고 다른 툴을 사용하는 걸 아직까지 본 적 없다.) 그래서 웬만하면 PPT를 추천하겠다.
현재 우리 회사의 경우, 공간 위주의 콘텐츠가 있어 제품 사진이 들어갈 일이 없지만 일반 B2C 브랜드의 경우에는 대부분 상품이 콘텐츠에 들어가는 일이 많다. 그런 경우 누끼 사진을 얹어주면 훨씬 편하다는 것.
R&R을 명확히 나누자면 콘텐츠 마케터는 '기획'을 하는 사람이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지만 기획의 범위에는 아주 베이직한 디자인 가이드가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디자이너의 R&R을 침범하라는 것이 아니다.
폰트까지 나노 단위로 정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나눔스퀘어 등의 깔끔한 느낌의 폰트' 혹은 '손글씨를 연상케 하는 폰트' 등의 느낌(이런 느낌을 전하고 싶다면 레퍼런스가 꼭 필요하다.)을 이야기하란 것이고, 특히나 텍스트 중 볼드(굵게 표시) 혹은 강조가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ppt에 꼭 적어주길 바란다.
콘텐츠, 특히 첫 콘텐츠들은 텍스트 위치나 크기 등 디자이너와 충분히 논의해가며 유동적으로 맞춰갈 수 있으므로 초반에 모든걸 완벽하게 만들어내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실 콘텐츠 디자인을 맡긴다-라는 건 어느 정도 우리 브랜드 디자이너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문제와도 이어지긴 하는데, 나는 여태까지 너무나 능력 있고 실력 좋은 디자이너들과 일해왔기 때문에(지금도 너무나 그렇다.) 디자이너들의 의견이나 판단을 전적으로 믿는 편이고, 그래서 그들이 잘 만들어내준 콘텐츠에서 일부 내가 기획했던 의도에서 빗나간 디자인 등만 수정을 요청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한다.
처음은 누구나 있고, 처음은 누구나 어렵다.
지금도 나는 우리 브랜드에 새로운 콘텐츠 시리즈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곤 한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내 길이 아닌가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내 기획이 콘텐츠로 만들어져 꾸준히 발행되는 모습을 한 번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이 직업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을지도 모른다. 혹시 과부하가 걸렸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의 뿌듯함을 느낀 현재의 내가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