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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May 19. 2022

수전 손택: '이미지'의 '검은 테두리'를 복원하기

[재현 너머의 재현 : 1] <<타인의 고통>>

1. ‘고통’을 재현하는 ‘이미지’

  고통에 대한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 고통은 과거의 것일 때도 있고, 동시대의 것일 때도 있으며, 과거에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현재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이미지’로 존재하는 한 영원히 ‘타인’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또 그 고통이 ‘타인’들의 것이기 때문에 ‘이미지’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데에서도 문제는 발생한다. 말장난 같은 말이지만, 수전 손택의 논의를 살펴보며 타인의 고통을 재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재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결과가 그렇다. 이 말장난 같은 문제에 맞닥뜨려야만 한다.

  이 책은 고통에 대한 책이다. 그 중에서도 수많은 타자들, ‘너’들의 고통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동시에 ‘너’들의 고통에 반응하는 ‘우리’에 대한 책이다. 더 나아가 그 ‘우리’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이나 총탄자국, 와해되어버린 마을 등의 이미지를 보았을 때 ‘우리’는 충격에 휩싸이고 연민이나 환멸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통의 이미지들이 던져준 충격이 선의의 사람들을 단결시켜주고 더더욱 타인의 고통에 눈 돌리게 할 것이라는 기대로 많은 재현의 주체들은 더 ‘리얼’하게 고통을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충격과 공포를 자아내는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을 가져다줄 뿐, 반복되면 무뎌지고, 또 지나치면 회피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고통의 이미지들은 전쟁이라는 폭력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고통을 재현하는 이미지가 실패했다고 한다면, 왜일까. 먼저 공포와 연민이라는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때 쉽게 ‘공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은 바로 그 순간 ‘공감’이라는 것은 실패한다. ‘공감’한다고 쉽게 믿어버리는 순간 타자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통의 이미지는 ‘우리’와 ‘너’들 사이의 거리가 있을 때 가능하다. 거리가 없다면 사진은 존재할 수 없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찍히는 피사체의 거리도 거리이지만, 그것이 사진으로 인화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때 ‘너’들이 놓인 고통의 공간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공포와 연민은 바로 이 거리감에 기인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선한의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뻔뻔한 반응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하나의 자극으로 관조하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 받는 그들이 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따라서 공포와 연민만을 느끼기를 그만두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타자’라는 외부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면, 따라서 그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면, 이미지는 영원히 실패할 것인가. 타자의 고통을 대신해서 느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고, 상상하는 것 마저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미지’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한 다는 사실, 이미지는 애초에 타자와 거리를 둠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 내가 이미지를 보고 느끼는 이 뜨거운 감정들은 사실 이 현실을 바꾸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이 슬픈 사실들을 깨닫고 좌절했다면, 우리는 그 좌절을 받아들이고 타자의 고통에 다가가는 더 겸손하고 새로운 도전을 생각해볼 준비가 된 것이다. 재현 불가능성을 재현한다는 최근의 시도들은 그 좌절로부터 시작된 것일 테니 말이다.



2.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기 위하여

  - 아우슈비츠에서 온 4장의 사진들


  재현불가능성을 재현하는 일, ‘우리’와 ‘너’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는 이미지란 어떤 것일까 하는 데에 대한 좋은 자각을 가져다주었던 텍스트가 있다.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 고통에 대한 재현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이 4장의 사진들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되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오윤성 역,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아우슈비츠에서 온 네 장의 사진』, 레베카, 2004/2017.


  사진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한 존더코만도 (나치는 수용자들의 일부를 존더코만도 부대로 만들어 동족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시켰다)에 의해 찍힌, 아우슈비츠 내부의 거의 유일한 4장의 사진이다. 존더코만도는 매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유대인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아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몰래 사진을 찍어 외부로 보내거나, 쉽게 제압되었지만 반란을 도모하는 등의 계략을 꾸릴 수도 있었다. 실제 아우슈비츠에서는 이들에 의해 총 2번의 반란이 일어났었다. 이 4장의 사진을 찍은 존더코만도 ‘알렉스’는 방금까지 유대인들이 갇혀 있던 가스실의 지붕을 수리할 것을 명령받고 가스실 내부로 들어간다. 그 곳에 숨어들어 그가 찍은 사진은 방금까지 이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들의 시체를 소각하는 장면이다. 목숨을 건 시도였고, 알렉스 그 자신의 목숨 하나가 아닌, 이 참상을 바깥으로 알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무릅쓴 사진은 그 급박함을 보여주듯 심하게 흔들리고, 초점도 불분명하여 뒤틀려있다. 알렉스가 찍은 사진은 우리가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것에 비한다면 어떠한 직접적인 참혹함을 보여주지도, 따라서 자극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이미지가 주는 자극과 스펙터클에 익숙해져버린 우리에게 이 이미지는 실망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따라서 위의 사진들은 다음과 같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검은 배경은 모두 지워지고 사진의 밝은 부분만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의 절반 이상이 검은 배경이었던 것은 알렉스가 가스실에 숨어들어서 몰래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이었다. 하지만 저 어두운 가스실의 테두리가 없어지는 순간, 이 사진은 마치 아우슈비츠의 외부에서, 또는 나치에 의해 편하게 찍힌 사진처럼 보인다. 원본의 이미지에서 잘려나가 버린 검은 테두리가 말해주던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사진은 모든 것을 무릅쓴 한 존더코만도 ‘알렉스’에 의해 찍혔다는 것, 그가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방금 까지 저 시체들이 살해당한 가스실의 내부라는 것, 그는 그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의 주검을 처리하는 시체처리반이라는 것, 그렇기에 이 지옥의 수용소에 살아남아 이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알렉스는 머지않아 사진 속 저 시체들처럼 될 운명이라는 것. 이 이미지는 이 모든 것들을 무릅쓰고 있다는 진실. 이 모든 진실들은 검은 테두리와 함께 탈각되었고, 사람들이 관음증처럼 보고 싶었던 사진의 밝은 부분만이 확대되고, 심지어 왜곡되었다. 나체인 상태로 가스실로 끌려가는 한 여인의 신체는 그 흔들림과 뒤틀림이 보정된 채 유방, 허리, 골반 등의 굴곡이 분명하게 식별되는 신체로 보정되었다. 우리가 접하는 고통의 이미지들은 이런 식으로 선별되었고, 어떠한 진실들은 탈각시켰으며, 왜곡되었다. 우리는 이미지의 밝은 부분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알렉스가 놓여있던 어둠의 테두리다. 그 테두리에 우리가 다가가야 할 더 많은 고통과 진실이 담겨있다. 따라서 그 테두리를 들여다보아야하고, 그 테두리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상상해보아야 한다. 저 사진들은 전쟁영화의 스틸 컷이 아니다.  


  이미지는 비추고 싶은 것만을 비추고,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고 싶다면 단지 눈을 뜬 채 그러한 ‘이미지’들을 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 너머의 것, 탈각되고 지워져 버린 검은 테두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미지가 상정하는 ‘우리’ - ‘타자’라는 거리감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안전하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려나간 검은 테두리 안에서 빛을 받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마주해야만 한다. 밝은 이미지의 바깥을 이루는 암흑의 테두리, 그곳에 ‘타자’와 함께 있는 나를 상상하기를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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