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 ‘최소한의 선의’를 읽고
누군가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혹은 열심히 살아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고 하면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자유를 얻고 싶어요”
지금이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명품을 마음껏 사는 건 아니더라도 온라인 아이쇼핑을 하다가 원하는 옷이 보이면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예약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배와 눈에 행복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휴가를 내고 문화생활을 하러 갈 수도 있는 정도의 자유는 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부당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항상 구제해줄 만큼의 자유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자유가 어떤 거길래?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안 하고 싶은 것을 안 하는 상태가 내 삶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라면, 돈을 많이 벌어서 원할 때만 일하고 원하지 않는 일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내쳐버릴 수 있는데.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게 돈이었던 걸까?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타인이 내 말에 따르도록 하게 만드는 거라면, 내가 원하는 게 권력이었을까? 이 모든 걸 아우를 수 있는 시간의 자유까? 모두에게나 시간은 365일 24일로 공평한데, 시간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떠한 수단이 필요한 걸까. 치열하게 고민이 필요한 가치를 ‘자유’라는 두 글자 안에 너무나 쉽게 표현했던 게 아닐까도 싶다.
본래 자유는 왕이나 귀족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의 억압에 대항해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투쟁의 전리품이었지만, 21세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존재로부터 자유를 투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왕’이나 ‘귀족’과 같은 사치스러운 단어가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지켜보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정말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의 상황이다. 기술적 혁신 아래에서,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다는 번드르르한 문구 아래에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은 현 사회에도 만연하다.
사회적 약속은 측은지심에서 비롯된다. 불쌍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불쌍해하는 마음은 어짊의 근본이다.
- '공손추편', 맹자
누구나 보거나 들으면 울컥할 수 있는 감정, 이로부터 상대방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저자는 인간을 존엄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로 좁혀서- 속옷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적 공격을 받았던 여성 연예인의 이야기가 나에 대한 억압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나처럼 이제 막 홀로서기를 연습하고 있는 동갑내기여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여성 전체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화살이자 그러한 시선을 보내는 이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가 굳이 이유를 세어보지 않아도 인스타그램 게시물보다 스토리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리고 인스타그램의 핵심인 ‘하트’를 누르지 않는 이유도 내가 사회적 인식과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증거이며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나’라는 존재가 언제 누구로부터 규정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개개인이 말하는 정의가 제각각일 때가 많다. 용어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의 맥락과 배경에 대해서 터놓고 얘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양극화, 살면서 가장 지양하고 경계하는 태도다. 짧은 인생 살아오면서 알았던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음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이 꼭 ‘옳음’은 아니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당장 코로나 이후 월급 한 푼 깎이지 않고 편하게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던 내가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부터도 시야를 확장하고자 했던 노력이 이미 화살표를 만들어놓고 기울어지던 게 아니었을지 의심해보게 된다. 사회에 더 건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현실 도피적인 생각이 아닐까도 싶다. 동시에 사회 곳곳에서 자칫 외면하기 쉬운 목소리를 전달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고마움과 존경심이 마구 올라온다. 앞으로도 더 많이 보고, 듣고, 귀 기울이고,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