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글
글을 쓴다는 행위 이전에 선행되는 것이 글을 배워 안다는 것이다.
'글을 배워야 한다' 는 지금의 이야기이지 불과 백여년 아니, 몇 십년 전만 해도 '글을 배울 수 있다' 였다.
지금도 글을 읽지 못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열린 한글 학교가 있고, 그 분들이 이제 드디어 한글을 배워 삐뚤 빼뚤 써내려간 시들이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이야기들을 접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왕비 중에서 유일하게 실록에 '문자를 아는자'로 기록된 이는 문정왕후 뿐이었다. 조선시대 최고 가문의 자식이자 최고 권력에 있던 여성들조차도 글을 배우지 못했다.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서양에서도 그랬다. 글을 아는 여성 글을 읽고 토론하는 여성들의 모임이었던 '블루스타킹'은 남성들과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읽는 걸 넘어 글을 쓰는 이들은 '배운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이라는 우월감이 따라붙을 수 밖에 없을테다. 그 우월한 문화는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읽고 쓸줄 아는 이 시대까지도 사람들의 인식에 배겨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이들은 그 글에서 본인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경향이 느껴진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만큼 알고 있어'
주변에 교수 친구들이 좀 있다. 매도하고 싶진 않지만 특히 논문 써본 박사급 이상들의 글은 참 읽어내기가 힘이 든다. 그래 알겠는데 뭘 말하고 싶은데? 라는 질문이 절로 든달까?
아래 두개의 예문을 보자
1. [권리를 향유하는 방법에 있어, 국가가 가장 적극적인 책임을 이행해야할 필요가 있다. 다만, 국가만의 이행의무라고 제한하는 경우 그 경계 밖에 있는, 사각지대에 놓인 권리들에 대하여 구제절차가 마련되기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대안을 강구해야하는가? 우선, 미등록이주아동들의 사례를 논해보기로 한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등록외국인이 아닌 상태로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이주배경아동들을 지칭한다. ]
2. [대한민국에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미등록 이주아동'이 바로 그들이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자로 정식 등록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인간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천부인권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권리는 국가가 보장을 해줘야 한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미등록된' 이주 아동들의 권리는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자는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왔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글임에도 읽다가 다시 한번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번 더 읽어나와야 하는 글이 있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글이 있다.
어려운 한자어나 사전에서나 볼법한 단어들은 글을 굉장히 고급지고 있어보이게는 만든다. 번역체의 표현 또한 그러하다. 더해 글쓴이가 얼마나 지적인 사람인지도 나타내준다. 본인의 지적 수준은 논문같은 연구문에서 마음껏 뽐내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읽어줄 글을 쓸 마음을 먹었다면, 나를 드러내는 글이 아니라 읽는 이들이 그 글 속에서 글쓴이와 함께하고 있다고 느끼는 글을 써야한다.
쉽게 말해서 '글에서 니 목소리가 들려' 정도면 완벽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