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마시기 좋은 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다.
어린 아이의 볼을 부벼대는 듯한 고소한 바람이 손가락 사이 사이로 스미는 그런 봄날이다.
이런 봄날의 밤은 특히 형용할 수 없는 내 머릿속의 냄새마저 바람을 타고 온다.
킁킁 킁킁
청량하면서도 고소한 참깨를 레몬에 으깨어 넣은 듯한 냄새가 그러할까?
이런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하나다.
'밖에서 술먹기 딱 좋은 날이다!'
밤이 짧아지기 시작하여 낮술을 갈망하는 자에게 더 없이 좋으며, 온도는 25도를 오가며, 적당히 술을 먹어 열이 오른 시간이 되면 밤바람이 오락가락 하며 그 열기를 식혀주는 환상적인 날씨, 편의점마다 야외 테이블을 펼쳐 둠으로써, 저렴한 가격에 편맥까지 할 수 있는 경제적음주생활에 아주 적절한 환경이다.
거기에 더해, 이런 기온의 날씨라면 술먹고 자빠지고 엎어져서 뻗어도 동사할 위험성이 지극히 낮아지기까지 하는 완벽한 시기가 아닌가.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꽤 많은 비중으로 등장하셔서 우리의 두뇌를 혼란하게 해주셨던 칸트 선생도 실천하는 이성이라고 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조건이 갖추어진 술마시기 좋은날은 1년에 몇번 있지 않는다’ 라는 논리적인 이성판단에 이르렀다면 더이상 주저해서는 아니된다.
이미 카톡창을 열어 술친구들에게 메세지를 날리고 있는 지극히 이성기반행동주의자다운 늠름한 나의 손가락들이라니...
어김없이 술꾼들은 술집 야외 테이블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술잔을 기울여대다 혹여나 바람에 따라 날려온 벚꽃 이파리라도 하나 술잔으로 또르르 떨어지면, 이건 이백이고 두보고 다 내 발아래 있는거 마냥 주취자의 감성적 언어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다.
이런 날 먹는 술과 안주는 10년 삭힌 김치와 홍어를 가져다 줘도 방금 밭에서 캐내고 바다에서 잡아올린것마냥 탱글탱글하고 상쾌하게 입으로 들어간다.
봄바람이 높이뜬 달만큼이나 아득히 멀어지고 자정을 지나 찬이슬이 맺혀갈때쯤이나 되어야 술자리가 마무리 되고 오늘도 참 잘 먹었다며 집으로 향하지만, 분명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이 근방 어딘가에 모여앉아 있을거라 확신하였으며 어김없었다.
술 마시기에 좋은 날이라며 입에 거품을 머금고 오늘이 아니면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모기가 들러붙어 뜯어내는 그런 계절이 오면 절대 술을 마실 수 없을 것처럼 이야기하며 매일 매일은 술판을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은 또 운치까지 더해졌다며 천막 아래로 기어들어와 그 비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동지섣달이나 초중말복때 술을 안마신것도 아니다. 연말이라고 마시고 복날이라고 삼계탕과 함께 곁들이고, 그놈의 월드컵이니 올림픽이니 한일전이니 하는 이유로도 다양하게 마셨다.
그렇다. 딱히 술먹기 좋은 날이라고 이유를 백만개쯤 가져다 붙히니 그렇지만, 술을 먹자고 하면 좋은 날이 아닌 날이 없다.
흩날리기 시작하는 벚꽃과 가슴이 두근거려지는 이런 보드라운 봄날씨에 밖에 가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금주를 하든 안하든 말이다.
다만, 오늘 이날은 술먹기 좋은 날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밤길을 거닐어보기 딱 좋은 날일수도 있지 않은가?
손을 잡고 콧구멍에 봄바람을 집어 넣고 하염없이 걸어보는건 정말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에는 힘든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