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승우 Aug 29. 2024

[미술 담론]아티스트 직업윤리

관객을 위한 변명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다루는 재료나 주제에 제한이 많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한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특히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주제를 다룰 때는 생각보다 제한이 많다. 예를 들면 인종주의적인 의미,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작업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작업을 한 아티스트는 인종주의자, 성적 소수자 혐오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이런 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대 미술은 모든 것에 열려있다. 사실 이게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던시대의 예술이며 단토의 표현을 빌린다면 예술의 죽음 이후의 예술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며 미적 판단의 기준은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눈으로 보는 걸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아티스트가 자신의 가치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우선 소위 말하는 미술계에 직접 파고들어 가면서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다. 오프닝이 열릴 때마다 직접 참석하면서 미술 관계자들과 알아가고 그러면서 전시의 기회를 얻으면서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 전형이다. 전시 경력이 쌓이고 유명한 비평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동료 아티스트의 입에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몸값은 올라가고, 자신이 하는 작업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식이다. 프랑스의 경우를 예로 들면 지방 미술 대학(Beaux-arts)을 갓 졸업한 아티스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가 위치한 지방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지방의 공공 전시 기관, 갤러리에서 단체 전시를 기회를 얻는 걸 시작으로, 커리어가 조금 쌓이면 지방에서 개인전을 열다가 더 커리어가 쌓이면 파리에서 단체 전시를 하고, 더 유명해지면 파리에서 개인 전시를 하는 식이다. 또 다른 예로는 프랑스에서 전시를 한 한국 국적의 아티스트가 한국에서 조금 더 쉽게 커리어를 인정받는 걸 들 수 있다. 그렇게 인정을 받기까지 아티스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산다.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인 이런 방법이야말로 현대 미술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아티스트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아티스트 자신이 스스로 해온 작업의 예술적 가치를 강조, 설명하며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많은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설명하며 자신의 예술관, 철학을 소개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하물며 유럽의 경우에는 아티스트가 학회에 참여해 전문 학자에게 자신의 탐구 내용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경우도 있으며 학자들도 아티스트가 소개하는 내용에 틀린 내용이 있어도 거기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일종의 아티스트 '직업윤리'이며 이 직업윤리에 따르면 아티스트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예술관을 거리낌 없이,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누구'는 길거리의 '비천'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컬렉셔너' 혹은 고매한 '지식인'일 수도 있다.


이 직업윤리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아티스트란 다른 사람들처럼 '세계'에 속한 사람이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길거리의 노숙자보다 우월한 사람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상류층의 사람들보다 열등한 사람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전에 개인적인 인연으로 프랑스 남서쪽 툴루즈 미술 대학(Institut Supérieur des Arts de Toulouse)에 자주 드나들던 적이 있었다. 처음 갔을 때 미술 대학 학생들이 대학교 청소부와 거리낌 없이 '미술',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고 일종의 문화 충격을 받았다. 청소부는 공격하고 학생은 방어하던 식으로 진행됐던 짧은 토론은 청소부가 학생의 작업에 대해 형편없다고 말하고 자리를 떠나면서 끝이 났다. 사실, 처음에 묘사했던 아티스트가 유명해지기까지의 과정도 이 직업윤리에 기반한다. 아티스트도 이 '세계'의 사람인 이상 살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 낭만주의적 아티스트 개념에 반대해서 작업을 시작했던 60년대 아티스트, 그리고 그들의 후배들의 동맥에는 아티스트 또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 직업윤리'란 이름으로 박혀 있다.

둘째, 아티스트는 모든 걸 작업의 리퍼런스 혹은 영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어떤 철학자의 한 문장은 아티스트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리퍼런스가 되며 그 해석이 옳고, 틀림은 중요하지 않다. 질 들뢰즈란 철학자가 이런 방식으로 철학을 한 사람이다. 물론 들뢰즈는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그는 흄, 칸트, 헤겔, 니체, 베르그손 등 위대한 철학자들을 독자적으로 해석해 자신만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래서 각 전공자, 예를 들면 니체 전공자에게 틀린 내용이라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여전히 받고 있지만) 들뢰즈가 이룬 업적은 이런 모든 비판을 넘어설 정도로 위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티스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 공학 등에서 리퍼런스를 가져올 때는 그것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기반으로 새로운 예술적 제안(artistic proposition)을 선보이기 위해서이지, 학자들의 방식대로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아티스트의 탐구는 학자의 탐구와는 방법도 다르고 의도도 다르다. 아티스트는 한 사실을 중립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진 시각을 보여준다. 이런 '고의적인 치우침'은 정치적인,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작업을 볼 때 특히 두드러진다. (이런 고의적인 치우침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관객의 입장에서 이런 작업을 대할 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거리를 두는 목적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업의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예술의 목적은 어떤 명확한 주장을 하는 데 있지 않다. 데카르트가 말한 '명석, 판명'한 생각은 예술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항상 잉여를 가지고 무언가를 불투명(opacification)하게 만든다. 이 잉여라는 건 때로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개념일 수도 있다. 시가 산문이 아니고 시일 수 있는 건 이 '잉여'덕분이다.

Alfredo Jaar, Rwanda, Rwanda, 1994.  아티스트의 의도가 명확히 보이는 작업이다.

여기서 세 번째 직업윤리가 나온다. 바로 관객에게 좀 더 많은 해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이 작품에서, 작가에게서 투명한 의미만 보게 될수록 작품이 가진 불투명성은 사라지며 예술은 여타 학문 혹은 공허한 주장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아티스트들이 자기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대부분 둘 중 하나이다.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준비된 말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거나 너무나도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해서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거나이다. 그리고 관객 혹은 인터뷰어가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물어보면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닌 경우에는) 대부분 '맞다', '틀리다' 명확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지레짐작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아티스트조차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 놀라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아티스트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아티스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것이 좋다. 우선 작업이 가진 다양한 해석의 기회를 놓칠 수 있으며, 따라서 작품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을 무궁무진한 의미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관객의 위치는 그만큼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모든 아티스트가 여기서 묘사한 직업 윤리관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이런 직업 윤리관을 고려하는 것이 관객, 아티스트 서로를 위해서 좋다는 것이다. 아티스트 입장에서 보자면 작업이 자신의 손을 떠나 관객들이 부여하는 다양한 의미로 치장될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혜택을 받는 사람은 관객이다. 관객은 이제 이해하지 못할 추상적 어휘, 철학 개념, 미술사 지식들이 복잡하게 쌓아놓은 성 앞에서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평론가, 아티스트 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는 건 선택이지만 그 말들의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지닌 '불투명성'이라는 특징은 지식이 부재한 '관객'에게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며 때로는 이 알리바이가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평이 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작업 해석에 유효한 지식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작업을 받아들이는 깊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때로는 이 예술적 깊이라는 건 무지에서 나오기도 한다. 학문적 깊이가 기존의 학문 토대 위에서만 나올 수 있다면 예술적 깊이는 가끔은 기존의 예술을 무시하면서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철학 담론]미술사와 개인 심리 발달사의 유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