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ustwons Apr 10. 2024

66. 참삶

[독서와 생각]

66. 참삶


   내 생각에 참삶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다. 이를 누리는 방법 또한 간단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 건강을 유지하는 것,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자연을 존중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 온전한 시간을 사는 것, 그러한 것들이 참삶을 이룬다. 자연은 이미 많이 훼손되었고,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 결과다. 자연은 인간을 살아있게 한다. 식물과 동물들, 물과 바람과 하늘, 땅과 인간은 모두 자연이라는 이름의 한 몸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막별 여행자/ 무사 잇사리드 지음>

    


  현대인들은 참삶이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눈앞에 탐욕의 대상을 향해 맹주 할 뿐이다. 그것이 자연이든, 인간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현대문명은 탐욕의 바벨탑인 것이다. 현대인은 하루라는 시간을 잡으려는 굶주린 맹수와 같다. 시간은 소유해야 할 개체물이 아니다. 삶의 일부인 것이다. 시간을 잡으려면 도망가지만, 시간을 놓을 때 시간 속에 있게 된다. 침묵은 시간의 정지가 아니다. 침묵은 삶의 샘인 것이다. 등산길에 약수를 마시며 땀을 식히듯이, 침묵은 삶의 여정에서 얻는 신의 자리이다. 인간이 침묵할 때, 참 삶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바쁘게 사는 것은 악한 산물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잡힐 듯, 보일 듯하며 명확히 알 수가 없다. 누구나 인생은 초행길이기 때문이다. 자칭 지식이 있다는 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위로될 싶다가 절망하게 되고, 길을 쫓다가 헤매고 할 뿐이다. 결국 누구나 인생을 방황하다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삶’이란 어원이 ‘살다’의 동사에서 명사로 되었다고 한다. 살다(live)함은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초목도, 짐승도, 벌레도 살고 있다. 그런데 유난히도 인간만이 ‘살다’에 목을 매고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한 번 살아보고 두 번 사는 것도 아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자신이 원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어났으니 살고, 그저 존재하니 살고, 그런다고 말하며 제멋대로 살려는 인간도 많다.

  그러나 산과 들을 거닐 때마다, 자연에 사는 수많은, 다양한 생물들이 아무렇게 사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각자의 존재에 따라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만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아니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게 서로 물어뜯고, 짓밟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리해 봐야, 백 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 인생인 걸 말이다. 그렇지 현대문명에 의해 의술이 발달하고, 생활이 원활해지고, 그러다 보니 백 년도 넘게 사는 인간도 많아졌지.

  그런데 오래 산들 …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달픈 인생만 길어질 뿐이지 않는가? 좀 더 들, 결국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 한 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인생이 정말로 무의미한 걸까? 그 삶이 정말로 무가치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벌과 나비가 꽃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하찮다고 하는 민들레 풀만 보아도, 왜 그렇게 길가에나 모퉁이에 피어나서 꽃을 피우고 꽃씨를 날려 보내는 것을 바라보아도, 그 외에 다른 생물들, 동물들, 새들, 물고기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들 살려고 할까?

  더욱이 인간도 말이다. 끝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짓들도 이상하지 않는가? 웃고 울고 하면서, 때로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인간의 삶, 그것도 바르게 살려는 삶, 인간에게는 그런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삶(True Life)을 살려고 끝없이 고민(苦悶)하고, 사색(思索)하고, 구상(構想)하며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악한 생각을 하는 인간도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세상이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인간 세상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험난하기만 하여 절망하는 인간도 있고, 더욱 악을 쫓는 인간도 있으나, 인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왜곡되거나 사악한 길로만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잘것없다는 들에 풀을 보면 이해가 된다. 짓밟히고 뜯기고 불살라져도 들풀은 여전히 존재하며 숲을 이루게 하지 않는가? 이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란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인간은 참삶을 추구하며 개척하며 이어가도록 힘써 노력을 하고 있다. 고조선에 지도자였던 단군(檀君)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을 가르쳤으며, 석가는 번뇌하는 인간의 해법을 설파하였고, 예수는 참된 인간의 회복을 위해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현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거짓 현인들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과 인본주의 철학인들인 것이다. 몇 사람을 추려본다면, 헤겔의 관념론, 칸트의 인식론, 플라톤의 이데아론, 인도의 범신론, 다윈의 진화론, 니체의 초인주의 등에서 얼마나 맹종하듯이 듣고 배우고 열광하였던가? 그러나 다 거짓된 이념과 사상을 낳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며 인간의 가치를 위해 싸워왔던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음양의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럼 끝으로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는 참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군사상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석가의 ‘혜안(慧眼)’과 예수의 ‘진리(眞理)’에서 참삶을 찾아볼 수가 있겠다. 즉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삶과 인간의 고통의 근본을 자신 안에서 찾는 삶 그리고 인간의 본질과 회복을 위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참삶을 사는 길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생각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에 찾아오는 기쁨과 감사함,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자연을 그대로 보아주는 관계에서 인간의 마음은 진솔해진다. 어린아이가 마음껏 뛰노는 세상, 들에 짐승들이 뛰노는 세상,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는 삶이 참삶이 아닐까? 즉 상생(常生)과 공생(共生)을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자연은 항상 진실하다. 만물의 연장이라고 말하는 인간도 진실하다면, 참삶을 찾아가지 아니할까?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 중에 놀라운 말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와 같이 인간의 회복은 자신을 존재케 하신 창조주를 알아가는 삶에서 참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진리를 알면 인생에 자유를 얻는다.」는 놀라운 삶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10. 물체의 운동량의 보존적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