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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모 Jan 19. 2022

'책 혐오' 탈출하기① 재미있는 책

야, 너두 읽을 수 있어!

1. '책 혐오' 탈출하기 ① 재미있는 책


 국어 교사로서 ‘책 혐러’들을 만나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중학교 2학년 도현이는 책과 담장을 쌓은 지 오래였고 공부에도 큰 관심은 없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이 마블 시리즈와 래퍼의 팬이었고 친구들을 좋아했다. 뭐든 활자보다는 영상을 선호해서 책 줄거리마저도 유튜브에 검색하여 숙제를 해왔다. 국어 시간에 하도 떠들어서 소설 낭독자로 곧잘 지목을 받았고 <동백꽃>을 더듬더듬 읽다가 주인공 점순이를 집순이로 잘못 읽어 허탈한 웃음을 주는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도 놀고만 싶은 욕구와 중2 특유의 반항심이 합쳐져 안 좋은 시너지를 발휘했다. 책 앞에만 앉으면 온몸으로 "책 극혐!"을 외치는 듯했다.


 그런 도현이가 몇 달 후, 화장실에 가면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읽었다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쉬는 시간에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도현이를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헉, 도현아. 책 재밌어?"

 도현이는 나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 완전요." 

 도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람을 넘어 환희에 찼다. 책혐러도 책을 읽을 수 있다!       

  


 미국의 사회학 교수인 로버트 킹 머튼(Robert King Merton) 교수가 주장한 이론 중 ‘매튜 효과’가 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뜻하는 사회학적 용어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는 성경의 마태복음 13장 12절에 착안하여 언급된 용어다.


 나는 매튜 효과를 교실 안에서 자주 목격한다. 책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한 학생들은 계속해서 책에 도전하고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책에서 부정적 느낌을 받은 학생들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가는 데에 실패하고 나중엔 서점이나 도서관 근처에도 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는 한국 성인 종이책 독서율과 평균 독서량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긍정적이고 성공적인 독서 경험이 적을수록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영상 같은 다른 매체가 책을 밀어내기 훨씬 쉬울 것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상 한국에서는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성인이 절반 가까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최근의 독서 교육 흐름에서는 ‘독서 태도’와 같은 정서적 측면이 주목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해력, 즉 읽기 능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바로 독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다. <학교 속의 문맹자들>의 저자 엄훈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 능력을 해독과 독해의 인지적 능력으로만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읽기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읽기의 정의적 요인인 읽기 태도는 인지적 측면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읽기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지닌 독자는 자발적인 독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읽기 능력을 발달시켜 가지만 읽기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지닌 독자는 자발적인 독서를 하지 않게 되어 읽기 능력이 정체되고 읽기 능력에서의 개인차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읽기 능력에서 뒤처지는 독자들은 누적적인 실패를 경험하여 자아 효능감이 떨어지고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어 읽기뿐 아니라 다른 교과 영역에서의 학업 성취도도 뒤처지게 된다.  
                                                                                                       <학교 속의 문맹자들 中>   

     


 도현이네 반 아이들과 문학 수업을 하면서 모두에게 자신의 ‘인생 책’을 가져와서 소개해보라고 했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책과 긍정적인 독서 경험들이 쏟아지리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초임 교사의 환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었던 동화 <나쁜 어린이 표>를 들고 온 아이, 집에 있는 위인전집 중 <이순신>을 가져온 아이, 부모님이 추천해주셨다는 어려운 책을 들고 온 아이도 있었다. 자신의 인생 책을 진정성 있게 소개하는 아이들은 몇 안 되었다.


 이들에게 책 한 권에 푹 빠져서 재미있게 읽어보는 경험을 시켜줄 순 없을까? 수업 시간에 학교를 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대형 서점에 갔다. 평일 낮의 서점은 한가롭지만 가볍지는 않다. 각자 책들을 한 권씩 골라 진중하게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독서 할 수 있는 벤치는 이미 만원이고 책장 옆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오는 길에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들은 그 모습에 놀라 갑자기 교양이 생긴 것같이 살금살금 다닌다. 형형색색의 표지에, 눈길을 끄는 제목의 책들이 있다. 서점에 오면 문구 코너만 기웃거렸던 아이들도 책 사이를 다니며 한 권씩 집어 들고 뒤적여 본다. 손안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종이의 질감이 좋다. 특유의 묘하고 향긋한 새 책 냄새를 맡아본다. 그러다 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새 몇 명은 소설 코너에 멈춰 서서 책을 읽고 몇 명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에세이집을 읽는다. 도현이는 흥미롭게 본 영화 <메이즈러너>의 프리퀄 소설인 <킬오더>를 산다. 교실 속 ‘책혐러’들이 갑자기 문학 소년 소녀들이 되어있다.


"선생님 음악 들으면서 읽어도 되죠?"




 독서 태도를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의 사전적 의미는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을 말한다. 말 그대로 책을 읽으면서 소소한 즐거움, 흥미진진한 기분 혹은 자기성장의 기쁨이 느껴지는 책이면 재미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극혐하는 사람들일수록 접하는 책의 진입장벽이 낮아야 한다. 간혹 독서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만을 골라 끙끙대는 이들이 있지만, 독서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실패감을 더할 뿐이다. 어른들이든 아이들이든 읽어야 하는 책을 읽기 위해선 읽고 싶은 재미있는 책부터 읽어야 한다

 

 지금은 국어교사가 되어 추천하는 책이 무엇인지 질문도 받고 이렇게 책에 대한 글도 쓰고 있지만 나 역시 한동안 책보다는 다른 데에 관심을 쏟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내 눈길을 끄는 재미있는 책들은 존재했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해리포터>시리즈를 읽으며 기른 판타지적 소양(?)으로 커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담긴 <개미>나 <나무>를 읽었다. 어린 시절 읽은 <빨간머리 앤>의 감수성을 추억하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을 수 있었고, <우동 한 그릇>으로 일본문학에 대한 편견이 무너져 <냉정과 열정 사이>나 <1Q84>를 읽게 되기도 했다. 아빠 서재에 꽂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으로 자기계발서나 에세이집을 거리낌없이 접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책'을 꺼내들기엔 뭔가 눈치가 보이거나 자녀에게 선뜻 권하기엔 거리낌이 생기는 분들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책은 다음 책으로 건너가는 재미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준다는 것을. 

 재미있는 책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긍정적인 독서 태도는 생기지 않는다!

독서의 계절 가을, 야외 독서 중인 중2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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