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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잉맘 Sep 02. 2021

콩순이와의 대 전쟁

나의 한국어 영상 차단기, 그 후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외항사 승무원의 경우 해당 국가에 거주하며 비행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 전 나의 생활 베이스는 아랍에미레이트의 수도인 아부다비였다. 1년 넘게 비행을 하다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인해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아이가 9개월 즈음 대책 없이 퇴사할 수가 없어서 다시 복직했다. 급하게 젖을 뗐다. 기러기 엄마가 되어 홀로 아부다비로 복직하  비행기에서 땡땡 불은 젖을 짜내며 애 떼놓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청승맞게 눈물을 흘렸더랬지.


시댁, 친정 부모님 모두 일을 하시기에, 아이를 맡아주실 수 없었다. 미안하게도 여동생에게 갑자기 조카를 불쑥 맡기게 되었다. 당시 동생의 나이는 스물다섯. 결혼도 안 한 동생에게는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흔쾌히 조카를 맡아 키워주었다. 그런 동생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아, 아이에게 TV나 휴대폰 등으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을 막지 않았다.




퇴사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아이는 이미 걸음마를 떼고 걷고 있었다. 18개월 무렵부터 다시 아이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고, 나의 엄마표 영어 여정도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는 이미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어, 영상 시청을 내 뜻대로 제한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미리 동생에게 양해를 구해 최대한 영어로 된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디지털 네이티브인 16년생 아가의 유튜브 조작 솜씨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능숙하게 페이지를 넘겨 원하는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한국어 영상을 완전히 끊었다. 아이가 좋아하던  핑크퐁 노래들은 영어 버전으로 찾아서 틀어주었다. Super Simple songs, Cocomelon 등의 영어 유튜브 채널 적극 활용해, 영어노래로 아이의 흥미를 유도했다. 당시 아이의 최애 만화영화는 '로보카 폴리'였는데('공룡파'와 '자동차파'중 당연 자동차파였다), 다행히도 영어 더빙 버전을 찾아볼 수 있었다.(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한 눈을 팔았다 하면 귀신같이 한국어 영상이나 아무런 언어도 나오지 않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토이 영상 등 보곤 했다. 매일 부지런히 아이가 찾아낸 한국어 영상 또는 무성 영상들을 차단하는 것이 나의 할 일이었다.


최대의 난제는 콩순이였다. 어디서 콩순이 영상을 봤었는지, 어눌한 발음으로 '콩수이! 콩수이!' 하며 그렇게 찾아댔다. 하필이면 콩순이는 내가 유독 싫어하는 캐릭터였다. 엄마 말 안 듣고 아이스크림 다 꺼내먹어서 배탈 나, 엄마 화장품으로 동생 얼굴에 낙서하는 콩순이가 꼴 보기 싫었다.(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내게는 현대판 '짱구는 못 말려' 같은 느낌이라 이것 만큼은 영어로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 아이와 전쟁을 치러가며 콩순이 영상을 일일이 차단하기에 이른다. 말 그대로 전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보여달라고 울고 불고 떼쓰는 아이와, 보여주지 않으려는 나의 숨 막히는 전쟁!




3년이 지난 지금, TV에서 한국어 영상이 나와도 아이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루에 1시간(물론 매일같이 +a가 되지만) 동안 본인이 좋아하는 영어 콘텐츠를 보기도 바쁘다. 다른 친구들이 메카드 시리즈  때, Ben and Holly's Little Kingdom, Bluey, Jojo and Gran Gran 등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아이 사회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네버 에버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 때는 시크릿 쥬쥬 노래 부르며 '치링치링 치리링'하고, 본 적도 없는 헬로카봇 변신시키며 논다.


주변을 보면 엄마표 영어 시작 시기가 늦어질수록, 이미 한국어 영상에 노출이 많이 된 아이일수록, 한국어 영상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사실 나의 경우 운이 좋아 18개월이었던 건 오케이, 인정. 하지만 그보다 더 일찍 영상에 노출되었던 상황에서 최대한 한국어 영상을 차단하려 노력해야 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가끔 아이의 반대 때문에 듣기 노출을 시도조차 못한다 하시는 분들의 사연을 듣노라면 안타깝다. 노출해주는 시기가 늦으면 늦을수록 아이의 모국어는 급속도로 자라서, 영어 영상을 더욱 심하게 거부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몇 번 시도하다 결국은 학습지, 학원에 맡겨질 아이들 영어미래가 려져 슬프다. 때로는 엄마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법이거늘. 어머님들, 부디 독하게 마음먹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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