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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콘 Aug 23. 2021

살림의 여왕

 나를 자꾸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전화를 할 때나 만날 때나 틈만 나면 자신의 지식을 전수한다. 주제는 주로 ‘살림살이’다. 입만 열면 살림의 고수처럼 보일 수 있는 각종 꿀팁과 생활의 지혜 등을 줄줄 읊는다. 물론 말만 앞서는 것은 아니다. 체득화된 살림 팁들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쓰고 남은 플라스틱 상자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 보관함으로 사용한다던지 다 말라버린 꽃다발을 버리려고 했던 음료수병에 넣어 예쁜 화병으로 만든다던지 헌옷수거함에 넣으려 했던 옛날 스타일의 옷을 잘라 커피머신기 덮개로 만드는 식이다.

 그녀는 쓰레기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재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나는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집을 디자인하곤 한다. 그녀가 살아온 56년의 세월동안 그녀 안에는 엄청난 높이의 생활 지식 더미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런 그녀가 일주일 동안 내 집에 머물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오면 반갑지만 살짝 피곤한 면도 있다. 자신의 지식을 알려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이따금씩 고역으로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혼자서 우리 집을 청소하고 뜯어고친다.

“아이고, 얘는 대체 ‘이러고’ 어떻게 살았던 거야~?”

 정작 나는 내 집에서 매일 ‘이러고’도 불편함 없이 잘 살았다. 그러나 살림 고수인 그녀에겐 탐탁지 않은 점들이 눈에 띠나 보다. 나름 자취 8년차에 깔끔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매의 눈을 가진 그녀가 오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살림 여왕의 방문 소식을 듣고 나는 미리 대청소를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금세 무색해졌다. 그녀가 머무는 일주일 내내 우리 집에서는 ‘대환장 정리’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내 눈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녀에겐 결코 용납되지 않는 냉장고 내부, 옷장과 서랍장이 그 타깃 이였다. 특히 장 정리는 이틀에 걸친 대서사시였다. 그녀는 내가 노트북으로 일을 보고 있는 사이, 장롱에 있는 모든 옷들과 잡동사니들을 다 들어냈다. 내가 방으로 뒤늦게 들어섰을 땐, 그 모습이 마치 에베레스트에 있는 쓰레기산 같아 참으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아니, 이걸 언제 다 정리해? 대체 왜 그래 엄마...” 나는 이사 온 첫 날처럼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싹 갈아엎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눈동자에 망설임 따윈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대환장 정리’를 이틀 동안 함께 마무리했다. 막상 재정리를 싹 하고 나니, 수납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고 보기에도 더 좋았다. 같은 방이라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공간의 크기가 달라보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명징한 그녀의 수납 공간 활용력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 상태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 오랜만에 방문한 딸의 집을 말끔히 변신시켜 놓고 그녀는 자신의 터전으로 유유히 돌아갔다.     


 그녀가 다녀가고 나면 집 안 곳곳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이 잔뜩 티를 낸다. ‘나 이렇게 바뀌었다!’ 하고.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작은 것에도 아름다운 디테일이 불어 넣어져 있다. 일주일 간 그녀에게 베이킹 소다의 활용 방법과 실리콘 주방 용기의 장점, 나무 도마를 오래 관리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확실히 들어두면 유용한 생활 정보들이다. 그녀가 있기에 나는 KBS2 생생정보를 챙겨 볼 필요가 없다.    

 



 그녀는 항상 내가 ‘똑부러지고 지혜롭게 살림하는 사람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다 결국엔 너를 가장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뇌 속의 암세포가 재발하면 나는 단명하게 될지도 몰라~

라는 웃지   우스갯소리도 한다. 사실 그녀는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되면, 자신의 살림 비법들을 딸에게  전해주고 떠날까  걱정하고 있다. 내가 살림 못하는 여자가 될까봐 그런가. (지금도 혼자  먹고  사는데 말이다.)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있는  그녀의 조급한 가르침에 가만히  기울이는 것뿐이다.


 그녀가 더 이상 살림을 알려줄 수 없는 그런 날이 부디 느리게, 천천히 오고 있기를 기도한다. 전수 받을 비법들은 아직 무궁무진 하고, 무엇보다 그녀가 오래도록 내 옆에 남아 있길 바라기에.


 엄마가 가고 난 뒤, 가지런히 정리된 냉장고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삐삐- 경고음이 울렸다. 그녀의 손이 닿았던 집 안 곳곳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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