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nama] 유플러스 멤버십 - 밀리 서비스 종료에 대한 푸념
살아오면서 대부분은 책을 많이 읽는 편에 속해왔다.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독서량임에도 당장 내 주변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 주변에서는 쉽게 '책 읽는 사람'의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게 한 달에 한 권이든 1년에 한 권이든 살아가면서 책을 읽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몹시 관대하게도 '책 많이 읽는 사람'으로 쳐주었다.
그 타이틀에 민망하지 않을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으나,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책을 가까이 하기는 했다.
엄마 손에 억지로 끌려갔던 심리상담소의 상담사는 그게 무심한 엄마에게 관심을 받기 위한 거라고 했다.
엄마가 내게 관심이 없고, 책을 좋아하니 나도 따라서 책을 좋아하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책을 가까이하게 된 거라고.
그럴싸한 해석이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책감이 주특기인 엄마는 또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했고 대단치도 않은 분석을 내놓으며 나를 설명하려던 상담사에게 아까운 돈을 줘가며 몇 번을 더 데려갔다.
어릴 적의 나는 예민해서 자주 두통에 시달렸다. 엄마는 그게 심리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심리적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담이 내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내담자의 마음을 열지 못한 상담사가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시시한 상담이었다. 오만한 얼굴의 아저씨가 자꾸 나에 대해 맞추고, 내 꿈을 멋대로 해석하고, 아닌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하면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확신에 찬 오답을 내뱉어대는 그런.
그렇지만 종종 내가 왜 책을 읽게 되었나- 하는 생각에 잠길 때, 가장 먼저 그 상담사 아저씨의 말이 생각나게 되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책을 읽게 된 걸까- 하고.
엄마가 애서가라는 것도, 자발적 독서로 관심을 끌고 싶은 마음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랑받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면 더 많이 읽었을 테다.
나는 사랑에 상당히 목마른 어린이였고, 책을 읽으면 따라오는 약간의 관심과 칭찬을 즐기기도 했으나 고작 책 좀 읽는다고 해주는 칭찬에 고취되기에는 욕심이 많았다.
받고 싶은 사랑에 비해 칭찬은 너무 소소했고, 그 소소함으로 텅 빈 항아리를 채우자고 미친 듯이 책에 파묻혀 살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멍청해서 그렇게 책에 묻혀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받자고 책을 읽었다기에 내 독서량은 너무 소박했다.
추측해 보건대, 어린 시절에는 책이 상당히 괜찮은 도피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책 속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 현실을 잊는다는, 그런 도피처의 개념은 아니다.
독서는,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다른 일들을 미루는 핑곗거리로 꽤나 유용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노는 건 허용되지 않지만 책을 보는 것은 누구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게임을 하며 밤새는 건 안되지만 책을 보다 밤새는 건 은근히 기특해하고,
TV에 집중해 대답을 하지 않는 건 혼이 나지만 책에 집중해 대답을 하지 않는 건 그러려니 했다.
조금 지루하고 재미는 없어도 내 나이보다 조금 높아 보이는 수준의 책을 읽고 있으면 더욱 좋다.
몇 마디쯤 못 들은 척 쌩까도 괘씸은커녕 대견해하기 때문이다.
많은 어른들이 그렇고 우리 집의 어른들도 그랬다.
책을 읽으면 많은 잔소리와 간섭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내게 독서는 사춘기 시절 방문에 걸어놓는 [출입금지] 팻말과 비슷한 것이었다.
[독서 중-잔소리 금지]
청소년기에 이르러서는 독서가 '척'하기 꽤나 좋은 행위라는 걸 알았고, 으스대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같이 서점을 간 친구에게 내가 읽은 책들을 가리키며 '내가 이렇게나 책을 많이 읽는다' (그래봤자 몇 권 없었고, 친구들은 대부분 한 권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알량한 잘난 척이었지만)고 으스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는 애'로 오해를 자주 받았던 내가 책을 읽는다고 하면 친구들은 놀란 얼굴이 되었고, 그 얼굴들을 보면 내 으스댐이 적중한 것 같아 뿌듯했다. 노는 애는 아니었지만 노는 애처럼 보이는 애가 책을 좋아한다니, 썩 괜찮은 반전매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기 그지없지만 그때의 나는 있어 보이고 싶었고, 이제 막 싹을 트기 시작한 지적 허영을 발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에 독서가 아주 적절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밤새 게임을 하든 영화를 보든 딱히 누가 쫓아다니며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성적에 맞춰 대충 진학한 대학교도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책 읽는다고 잘난 척할 대상도 없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부유하던 20대의 나는 이번에는 다른 개념의 도피처로 책을 이용했다.
불안감.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 세상에서 뒤처져 멀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나는 형체 없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있어.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나만 저 멀리 떨어져 낙오자가 될 거야- 매일 두려웠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점점 벌어지고 있는 간격을 책이 메워주기라도 할 거라는 듯이.
독서가 가장 쉬운 자기계발이라고들 하니까 책을 읽고 있으면 나도 조금씩이나마 계발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에 틀어박혀 TV만 보고 있자면 웃다가도 어느새 불안해졌지만, 그렇게 틀어박혀 책을 읽으면 왠지 조금 안심이 됐다.
책을 읽는 만큼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겠지. 간격이 조금쯤은 덜 벌어지겠지. 책을 읽는 만큼은 나도 성장하고 있는 거겠지. 스스로를 다독였다.
노트에 적힌 완독 도서의 리스트가 느는 만큼, 조금이나마 불안감이 희석되었으며 당시에는 그 방법 말고는 게으른 나로서는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도무지 찾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책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아마도 책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느덧 만 나이를 들이밀어도 30대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꼼짝없는 30대가 되고 나서야 나는 책이 좋아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잔소리 금지용 독서는 산만했고, 잘난척용 독서는 얕았으며, 불안감 해소용 독서는 처절했다.
독서의 이유가 되던 단서들을 모두 내려놓고, 책을 들게 되고 나서야 독서의 용도가 즐거움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독서의 역사를 거쳐 나는 이제 재미로 독서를 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법을 배웠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나 강박도 없고, (책을 많이 읽은 달에는 종종 '이번달에 이만큼이나 읽었다!'라고 자랑도 하고 싶은 날도 있지만) 자랑할 사람이 없더라도 책을 읽는다.
이 책은 꼭 완독 해야지 하는 다짐 같은 것도 없고, 편독하지 말고 다양하게 읽어야지 하는 목표 같은 것도 없다.
조금 읽다 재미없으면 던져버리고 다른 책을 읽는다. TV 프로그램이 재미없으면 휙휙 채널을 돌려버리듯.
오랜 시간 특기여야만 했던 독서는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취미가 되었다.
유플러스 VIP에게 제공되던 밀리의 서재 무료구독권 혜택이 없어졌다.
서비스 사용일이 끝나 재등록하려다 서비스 종료 알럿을 보고 간밤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 내 9,900원... 1년 구독권이면 99,000원...
그간 멤버십 혜택으로 야무지게 연명해 왔는데, 이제는 돈 내고 구독을 해야 하게 생겼다.
난데없이 깨지게 된 10만 원 때문에 속 쓰려하다가, 돈내고라도 구독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구독을 안 하면 안 그래도 포화상태인 책장과, 책장과 반비례해 가벼워진 텅장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골치 아파하다가, 엑셀로 빼곡하게 정리해 둔 읽고 싶은 책 리스트까지 떠올리다 보니 왜 이렇게까지 해서 책을 읽으려고 하나,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나는 어쩌다 책을 읽는 인간이 되었나-까지 생각이 뻗어 나와 주저리주저리 긴 글을 쏟는다.
MBTI에서 N이 92퍼센트였던 걸 생각하면, MBTI가 나름 신빙성이 있기는 한 것 같다.
밀리의 서재 결제나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