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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inama Jul 30. 2021

욕하는 연필과 욕받이 종이

[Grinama] 글쓰기의 시발점

딱히 글 거리가 없으면 그 핑계로 양껏 게으름을 피우는 습관을 개선해 보겠단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볼까 머리를 굴리다가 “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왜 글을 쓰게 되었는가.”라는 해 본 적 없지만 꽤나 해봄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왜 글을 쓰게 되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더듬어보자면 나는 글짓기로 상장 좀 받아본, 그럭저럭 글짓기에 재능을 보이는 어린이였다.

그러나 글짓기 대회나 독후감 숙제 같이 정해진 주제와 테마로 써야 하는 글을 썼을 뿐 자발적으로 글을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나 역시 방학숙제로 일기를 써야 할 때면 억지로 뭘 했고 어디를 갔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혹은 재미없었다-는 마무리로 성의 없는 글줄을 제출하던 꼬맹이였다.



자발적인 개인적 감정의 표현을 위한 글쓰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3살 터울인 오빠와 격렬한 전쟁을 치른 어느 날 시작되었다.

세상 많은 남매가 그러하듯 우리 남매도 서로에 대한 이유모를(당시에는 상당히 타당하다고 생각했을) 분노와 증오로 격동의 유년기를 보냈는데 그날도 그냥 그런 격동의 나날 중 하루였다.



우리 집은 딱히 아들, 딸에 대한 성별의 선호도가 없었고 차별도 없었지만 유독 오빠에게만 허락되고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욕이었다.



차별은 없었지만 아들에게는 자동차 장난감을, 딸에게는 인형을 사줘야 한다는 성 역할과 이미지에 대한 편견은 아직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던 시절이라, 오빠는 남자고 나는 여자라서 그랬는지, 오빠가 재능 있는 욕쟁이라 욕이 너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부모님이 오빠가 욕을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빠는 내게 말할 때 반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반은 욕을 사용해도 부모님께 별로 혼나지 않았다.



딱 잘라서 오빠는 욕해도 되지만 너는 안돼-였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기본적으로 남녀를 떠나 상하의 질서를 위해 언어 사용이 나보다 오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웠을 수도 있다.

매사에 이겨먹으려 드는 만만치 않은 동생으로부터 오빠의 위치를 어느 정도 보호해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내게는 오빠를 야!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지만 오빠는 열 번 욕하면 한번 정도 욕하지 마라- 라는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꾸중을 듣는 게 전부였다.



나는 야! 조차도 못하는데 매일 욕을 배 터지게 먹다 보니 더부룩함에 짜증은 극에 달해갔다.

언젠가 한 번 너무 화가 나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괄약근의 의지를 배반하고 항문에서 새어 나온 실 방귀처럼 입에서 “개새끼”라는 말이 튀어나온 적이 있었다.

“개새끼!!” 같이 적극적인 욕은 아니었고,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흘러나온 소극적인 “개새끼...”였다.



귀도 밝은 내 혈육은 냅다 그걸 부모님께 일러바쳤고, 나는 그날, 살면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혼났다.

그날 이후로는 다시는 오빠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덕분에 화가 날수록 욕은 하지 못하고 차분해지는 습관을 얻었다.



아무튼 그렇게 매일 욕은 성실하게 먹지만 토해내지는 못하는 답답한 전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또 한바탕의 치열한 전쟁을 마치고 나는 분노로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와 종이와 연필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터질것 같은 감정 과부화 상태가 왔을 때는 어디에라도 표출해야만 하는 법이다.

나는 쌓여왔던, 나 혼자 열심히 먹어왔던 욕들을 종이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오빠의 이름을 쓰고 그다음 줄줄이 쌍욕을 마구 적어댔다.

뭐 어떤 점이 싫다거나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거나 하는 사연도 없이 그냥 000 개xx 시xx 등등의 쌍욕을 열거하며 쏟아냈다.



차마 뱉을 수 없는 말들을 종이에 쏟아내는 게 나름의 분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마구 휘갈겨 적힌 욕들을 보며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 같은 해방감을 느낀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렇게 오빠의 욕을 적은 뒤 몰래 처리했다.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리고 나면  죄책감이 들기도 했으나 욕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연필이고, 욕을 받는 것은 오빠가 아니라 종이가 아닌가.

이 정도면 나는 결백하다고, 종이에 혼자 욕을 쓰고 처리하는 정도는 아주 신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연필은 나 대신 욕을 해주고, 종이는 욕받이가 되어 주었다.



나만의 해우소가 생기고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쏟아놓기 시작하면서, 어느샌가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들도 해우소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 무기력증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걸 알지만 알면서도 내 시련이 가장 참혹한 것만 같은 실연을 겪을 때 나는 조용히 나만의 해우소를 찾았다.

그렇게 남은 많은 흔적들은 어쩐지 애잔하고 애틋해서 언제부턴가 그 흔적들을 처리하지 않고 살려주었다.



격렬하게 나를 괴롭히던 감정들은 해우소를 거치면 조금쯤 진정되었고, 폭풍 같던 감정들을 어느 정도는 담담히 담아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 가면서 나쁜 일만 기록되던 해우소는 어느새 즐겁고 좋았던 기억도 함께 담는 내 인생의 앨범이 되었다.



이제 오빠는 더 이상 내게 욕을 하지 않는다.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소화도 되지 않는다는 오빠는 놀랍게도 내가 아는 사람 중 손에 꼽게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 어른이 되었다.

더 놀라운 건 집에서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밖에서는 우연히 마주쳐도 못 본 척하던 우리 남매가 이제는 어딜 가도 사이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우애 좋은 남매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둘 모두 그 사실을 어색함도 거부감도 없이 인정하니 우리가 좋은 사이가 된 것은 아마 분명한 듯하다.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취미를 만들어준 사람이  시절 어린 내가 있는 힘껏 미워했던  시절의 오빠라니, 재밌는 일이다.



아무튼 이제 오늘의 고민을 종결지을 수 있겠다.

내 글쓰기의 시발점은 '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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