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이야기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by 김도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3절.


한 여인이 반파된 궁전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눈으로 빚어 만든 듯 창백한 피부와 얼음으로 새긴 것만 같은 눈동자. 걸을 때마다 잘게 바스러진 얼음 조각이 흩날리는 드레스. 하늘에는 오로라가 가득했다. 궁전에는 함박눈이 흩날렸고 흰 벌떼가 그 주변을 알음알음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에는 여전히 그 무엇도 드러나있지 않았다. 그래, 이것은 카이를 잃은 한 여왕의 이야기. 그 서늘하고 찬연한 광경 아래, 여왕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득한 오로라와 쌓여가는 함박눈만이 얼음 궁전을 감쌌다.


여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족족 눈송이가 따라붙었으나, 여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기어코 다다른 널찍한 방 하나. 여왕이 모든 것을 부수며 유일하게 내버려 둔 방이다. 바닥에는 얼음 글자 조각들이 삐뚤빼뚤하게 놓여 있었다. 얼어붙어 떨어지지도 않는 것들. 여왕은 그것을 바라보다 글자 중 하나를 발끝으로 건드려보았다. 글자 조각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폭신한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의자에 앉았다. 흰 속눈썹이 하얀 살갗에 내려앉는다. 영원. 그 단어만이 뇌리를 맴돌았다. 여왕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겨울은 끊임없이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뎌진 지 오래. 그러니 그녀가 곱씹을 것이라고는 고작 스무 해 전에 있던 일뿐이다.


공허한 눈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것은, 그러니까 카이를 데려온 일은. 그녀 나름대로 내민 구원의 손길이었다. 거울 파편을 심장에 심은 카이는 더없이 차가웠고, 그런 그가 머물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따뜻했으므로. 그녀는 아직도 눈송이를 바라보던 그를 잊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끝에 내게는 무엇이 남았지? 여왕은 오랜만에 회의적인 생각에 잠겼다. 결국 그 작은 아이에게 온 세상과 스케이트를 선물하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아마 그 아이가 돌아온대도, 카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길 바랄 것이다. 그 아이가 이제 와서 이 세상을 바랄 리 없다.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랑하던 아이였으니.


여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영원을 사는 그녀가 최초로 곁에 들인 아이는 제 세상을 찾아 돌아갔다. 자리를 비우기 전에 한 번쯤 더 쓰다듬어주기라도 했어야 했나. 그랬더라면 그 아이가 걸음을 돌리는 데 한 번쯤은 더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이제 와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늘하늘 쏟아졌다. 그럼에도 생각은 자꾸 흘렀다. 그럼 그 아이는 다 자랐겠지. 어떻게 자랐을까. 분명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였으니 그대로 자랐다면 제법 건실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심장과 눈에 거울 조각을 심고서도 눈송이 사이에서는 있는 그대로 행복함을 만끽하던 어린아이였으니, 이제는 겨울이 아니라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잘 된 일이건만.

그러고 보니 카이를 데려간 아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여왕의 손가락이 의자 손잡이를 느릿하게 건드렸다. 참 이상하지. 이곳에 남은 얼음 조각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작 한 아이의 눈물 따위에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이 녹아내렸다고. 툭. 툭. 아. 역시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들은 어찌 그렇게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가. 여왕은 더 깊이 생각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고민은 그녀에게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늘도 얼음 궁전에 눈은 내리고 겨울은 잠시 끝나는 듯 보여도 끝내 돌아올 것이다. 하나의 관심사를 잃었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 사라질 것이었을 테니. 그래도 세상을 주겠다던 말은 진심이었는데. 오래간만에 아끼는 것이 생겼는데 그리 사라지니 스무 해가 지난 지금이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희석될지언정 잊지는 않을 것이다. 여왕은 그런 존재였으므로. 눈을 감고 있던 여왕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이제 반쯤 무너진 궁전을 복구할 때가 되었다.


여왕이 손을 뻗자 흰 꿀벌 떼가 날아들었다. 감히 여왕의 손가락에 앉은 꿀벌에게 여왕이 무어라 작게 속삭였고, 흰 벌떼는 일제히 날아올라 밖으로 사라졌다. 귀여운 것들. 여왕은 천천히 걸어 나가 손을 뻗었고, 궁전 여기저기 소복이 쌓여있던 눈은 시간을 역행한 듯 날아올랐다. 무너진 성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이 날아올라 벽에 쌓이고, 그 위에 흰 꿀벌이 올라타 눈을 다지면 여왕이 그것을 얼렸다. 얼음 궁전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제 모습을 찾았다.


고심 끝에 만들어낸 일거리를 그렇게 잃은 여왕은 다시 침대에 늘어졌다.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여왕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카이를 이곳에 데려온 날도 그렇게 나갔었지. 아니, 그 생각은 이만 지우기로 했던가. 아무렴 어때. 여왕은 다시 인간 형태로 돌아와 손짓했다. 두터운, 눈으로 된 겨울 망토를 어깨에 두른 여왕은 큼직한 얼음 썰매를 찾으러 나가고자 궁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총명한 눈과 추위로 발그레해진 뺨을 가진 남자가 눈의 여왕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인사가 늦었네요. 죄송해요. 카이입니다."

"겔다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자신을 겔다라고 소개한 여자는 뚱한 표정이었다. 다만 카이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카이, 이 옆의 여자는... 저번에 카이를 데려간 아이인가. 대충 상황을 짐작한 여왕은 놀란 심정을 가라앉히려던 것도 잠시, 곧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끊어진 인연. 더 볼 이유가 없는 사람들 아닌가.


"너희가 올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카이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겔다를 바라봤다. 겔다는 카이를 바라보다가 카이의 손을 꾹 쥐었다. 이곳까지 찾아오는 게 어지간히 불만이었던 모양이지. 아무렴, 어릴 적 단짝을 숨겨버린 이인데 당연한가. 여왕의 흰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셋 사이에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침묵과 바람 소리만이 허공을 메웠다. 여왕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거라. 나는 가볼 곳이 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전혀."

"여왕 폐하."

"돌아가라. 이곳에는 이제 네 자리가 없다."


카이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내렸다. 겔다는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으나 곧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저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여왕은 인상을 구겼다. 성가시구나. 여왕이 겔다가 말하려던 것을 끊고 다시 들어가려 등을 돌린 찰나, 카이가 소리치듯 말을 뱉었다.


"30분만!"


30분만 주세요... 뱉고서 스스로도 소스라친 기색이 느껴져 여왕은 다소 황당해졌다. 어쩌자는 건지. 그래도 오랜만에 맞은 손님을 반파된 궁에서 맞지 않게 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일까. 여왕은 몸을 반쯤 돌리고 그들에게 손짓했다. 수락의 의미였다. 둘은 환해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궁전에 들어섰다. 추위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모를 것이었으나, 어느 것이든 여왕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여왕은 자연스럽게 한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이 어린 카이의 방이었다는 사실은,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한 번 혀를 찬 여왕은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이네요, 이 방."


전부 치워버리셨을 줄 알았는데. 카이는 눈을 빛내며 방을 바라보다 바닥의 글자 조각들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여왕은 신경 끄라는 양 손짓했고, 그 손짓 한 번에 글자 조각들 위로 날아든 흰 꿀벌들은 작은 무덤처럼 그 위를 덮어 글자들을 가렸다. 여왕은 말했다. 그래, 무엇이 궁금해 찾아왔는가. 느긋하게 몸을 늘어뜨린 여왕은 두 남녀를 향해 손짓했다. 카이와 겔다는 옆에 생겨난 눈 의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가, 그 위에 앉았다. 눈 의자는 푹신했으나 차가웠다. 카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오랫동안 여왕 폐하 생각을 했어요."

카이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겔다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 할머니 품에 안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장미 정원에서 눈의 여왕을 만나러 간 겔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그리고, 카이와 여왕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들. 여왕은 이야기 내내 시큰둥했다. 여왕은 대충 손짓했다.


"그래, 듣자 하니 악역인 나를 조롱하러 온 것이로구나."

"아니에요!"


카이가 반발하듯 들고일어났다.


"폐하께서는, 제게 세상을 주겠다고 하셨지요."

"오래 전의 일이지. 지금의 너는 원치 않을 것 아니냐."

"네. 저는 그리 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무얼 바라 여기까지 왔는가?"


카이는 침묵했다. 겔다는 그런 카이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대신 말을 건넸다.


"여왕 폐하의 행복이요."

"... 내 행복?"

"폐하께서는 폐하만의 방식으로 다정하게 카이를 대하셨어요. 저희는 다정하신 폐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여왕은 침묵했고, 느리게 반문했다. 모든 것이 그저 내 변덕이었다면? 카이는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저는 폐하 덕분에 살아남았는 걸요. 그 상태로 제가 살던 곳에 남아있었더라면 자신은 아마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며 카이가 감사 인사를 건네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여왕은 이어지는 겔다의 어색한 목소리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죄송해요. 어릴 적에는 영락없이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카이를 데려가셨잖아요. 그렇지만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제가 알던 상냥한 카이를 되찾지 못했을 거예요. 겔다는 눈을 굴리다가 상체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상냥하신 여왕 폐하. 폐하 덕분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많이 길렀어요. 여왕은 멋쩍어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여왕으로서는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문득, 여왕은 눈앞의 아이들이 앉은 의자에 팔걸이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행하는 데 고민은 없었다. 여왕은 겸사겸사 등받이까지 만들어주고는 다시 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생각지도 않은 말은, 여왕의 마음 한편을 간지럽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여왕은 내색하지 않았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종용할 뿐이었다.


"할 얘기는 거기까지인가?"

"혹시 괜찮으시다면, 겨울마다 한 번씩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겔다의 야무진 말에 여왕이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추울 텐데."

"괜찮아요. 저희는 여왕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되었다. 내가 가마."

"정말요?!"


무얼 그리 놀라고 그래, 머쓱하잖니. 여왕은 가볍게 타박했으나 겔다와 카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끝내는 여왕도 웃었다. 날이 저물어 여왕은 그들에게 자고 갈 것을 권했으나 그들이 머물기에 여왕의 궁전은 너무 추웠고, 불을 피우자니 불은 여왕에게 너무 뜨거웠으므로 겔다와 카이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들이 돌아가는 데는 여러 날이 걸리겠지만, 여왕이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하루면 될 것이다. 그들이 집에 돌아가기 전에 제가 먼저 찾아가 놀라게 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여왕은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다. 물론 여왕 또한. 악역 없는 동화의 끝이 으레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