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루만, 아니 세 시간만이라도 시간이 멎었으면 좋겠다. 기어코 세 번째 실패작이 그의 앞에 놓였을 때 그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다. 구찬희는, 솔직히 말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영 재주가 없다. 어릴 때는 저 혼자 종이 한 장을 붙들고 꾸역꾸역 씨름하다 거의 30분을 흘려보내고서야 간신히 비행기 비슷한 덩어리를 만들었더랬다. 이런 식으로 상기하고 싶었던 추억은 아니지만. 잘라서 벽돌로 써도 되겠네. 케이크 시트 치고는 맷돌 뺨치는 견고함이 인상 깊다. 그럼에도 앞서 만든 둘보다는 빵 같아 보인다는 점에서 그나마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다. 평소 같으면 축하할 일이겠지만…. 또 한숨이 샌다. 이번에는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레시피 그대로 만들었는데 왜 이 모양이지? 한숨 한 번 쉴 때마다 멀쩡한 케이크가 만들어졌다면 진즉 포장까지 해서 갖다 주고도 남았으리라.
세 번이나 만들었으면 하나쯤은 제대로 된 게 나와줄 만도 하지 않나? 다 식지 않아 뜨끈한 벽돌에 대고 백날 천날 물어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다. 분명 동이 틀 때 시작했건만, 이제 해는 저만치 멀어져 간신히 아파트 옥상이나 밝히고 있으니. 찬희는 착잡한 낯으로 딱딱한 제누와즈를 바라보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 벌이지 말 걸. 고개를 돌려 꺼진 화면을, 검은 화면 위로 빛나는 숫자의 나열을 낱낱이 눈에 담는다. 5월 29일, 오후 6시 8분. 임하늘 생일이 말마따나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또 한 번 한숨이 샌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베이킹 도구는 어느덧 손에 익어 자연스럽게 손바닥에 감겨왔다. 치기 어린 욕심이 또 한 번 고개를 쳐든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딱 한 번만 더.
포장도 채 뜯지 않은 계란 한 판을 통째로 꺼내 든다. 두 번째 반죽이 미묘한 색으로 변해갈 즈음, 반죽이 든 그릇을 개수대에 내버리고 새로 사다 놓은 것이다. 그 시간에 진작 어디 빵집에나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구찬희는 마음을 돌려 집 근처의 잘 나가는 디저트 카페로 걸음을 옮기는 대신 진중한 표정으로 핸드믹서를 쥐었다. 레시피만 몇 번을 봤는지, 이제는 안 봐도 앞으로 할 일이 훤하다. 제발 이번에는 잘 나왔으면 좋겠는데.
째깍째깍. 오븐에서 나는 소리가 유독 선명히 귓가에 꽂힌다. 시간 진짜 더럽게 안 가네. 저 혼자 쏜살같이 흐르던 시간이 이번에는 옷자락을 붙들고 질질 늘어진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아파트 너머로 사라진 시점이다.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마른다.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는 오븐 소리에 죄 묻혔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접착제로 어디 붙여둔대도 이렇게까지 느리지는 않을 것인데. 하염없이 기다렸다. 두 시간 같았던 30분이 흘렀을 즈음.
“... 됐다.”
노릇하게 구워진 제누와즈에서 진한 버터 향이 풍긴다. 황급히 꺼내려다 손을 데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븐 장갑을 끼고 원형틀에서 제누와즈를 분리했다.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빵을 세 덩어리로 자르고, 냉장고에 넣어둔 휘핑크림을 꺼내 넓은 단면에 바르고서 그 위에 씨 없는 청포도를 얹었다. 도로 겹쳐 쌓아서는 치덕치덕 두텁게 크림을 바른 모양새가 보기에도 영 투박했으나, 알 굵은 청포도 알갱이를 여럿 올리니 그럭저럭 볼만한 것이 나왔다. 구찬희는 곧장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하늘에게 지금 잠깐 찾아가도 괜찮겠냐는 문자를 남겼고, 긍정의 답이 떨어지자 포장해둔 케이크에 꽃다발까지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구찬희는 안에 든 케이크가 망가질까 차마 뛰지도 못하고 잰걸음을 옮겼다. 조급한 마음에 걸음은 갈수록 빨라졌고, 고르던 숨소리는 금세 흐트러졌다. 그러게 왜 생전 안 하던 짓을 해서 하지 않아도 됐을 고생을 했는가? 이유를 물으면 구찬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임하늘이 케이크를 좋아하더라. 그래서 그냥 구워봤는데, 안 되니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중요한 인과관계가 생략되었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면 애초에 굳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임하늘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알고 있었다. 굳이 파헤쳐 직면하지 않았을 뿐. 가끔 반짝이는 화면에 하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을 때, 이름 석 자가 뇌리에 박혀도 모른 척 반죽에 열중한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급한 걸음에 심장이 달음박질친다. 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가 하늘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9시가 채 되지 않았으니.
“뭐야, 벌써 왔어? 날도 더운데 천천히 오지.”
더워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희미하게나마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하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에 든 선물로 떨어졌다. 이게 다 뭐야! 내가 노란 튤립 좋아한다고 한 거 기억하고 있었어? 들뜬 목소리에 찬희는 손에 든 것들을 하늘에게 안겨주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케이크도 좀 봐주라. 내가 만든 건데.”
“뭐? 진짜?”
진짜 직접 만든 거야? 놀라움에 커진 눈이 케이스에 담긴 케이크를 담는다. 만족감을 담아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던 구찬희는, 다음 순간 문득 웃는 얼굴 그대로 어색하게 굳어졌다.
“고마워, 찬희야. 나 진짜 이런 거 처음 받아봐. 잘 먹을게.”
눈 녹듯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에 허무하게 시선이 사로잡힌다. 오는 내내 따끔거리던 손끝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등신 구찬희. 이런 걸 묻어두고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이거지.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입가에 얕게 볼우물이 파인다. 결국 완전히 붉어진 귀 끝이 속절없이 찾아든 초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심장이 턱 아래까지 치달아 빠르게 맥동한다. 부정할 수도 없게 되었다. 가끔 거스러미처럼 남아 손끝을 간지럽히던 감정은 기어코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길가의 연인들이 속삭이던 그 진부한 표현들이 대체 어떤 맥락으로 뱉어지던 말인지. 빌어먹게도, 모든 게 이해가 되다 못해 절절하게 와닿는 순간이다. 그러나 구찬희는 목 끝까지 치달은 감정을 고백하는 대신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직 감출 수 있다. 그동안 내 감정이 얼마나 새어나가 네 어깨를 적셨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너를, 이 관계를 잃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