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비빔밥에 대한 우리 집의 역사는 독일에서 연구 생활을 하던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MZ세대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옛날에는 남자들의 부엌 출입은 금기시되었다. 요리는 물론이고 밥도 한 번 해본 적 없던 내가 생전 처음으로 낯선 땅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점심은 연구소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면 되는데, 아침저녁 식사가 문제였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육류, 각종 채소, 쌀을 넣고 물을 적당량 부은 후에 끓이는 잡탕 죽이었다. 요리연구가인 아내가 나중에 합류하여 붙인 이름이 '꿀꿀이 죽'이었다. 큰 냄비에 한 솥 끓이면 2~3일은 너끈히 해결할 수 있었고 영양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그 당시 나에게는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다.
만약에 내가 다시 요리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옛날에 개발했던 '꿀꿀이 죽'에 좀 더 품위를 더해, 요리 이름을 나 만의 독창적 독일어인 '나룽스주페(Nahrungssuppe; 영양수프)'로 개명해 다시 재현시키리라.
아내는 평소 음식 만들기를 무척 즐겨하여 아이들의 간식도 쌀자루에 가득 만들어 놓고 먹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아내도 어느덧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식사 준비를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옛날의 꿀꿀이 죽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나의 제의를 일축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10여 년 전부터 아내가 절충안을 채택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집 비빔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채소나 육류 등을 종류별로 평소 반찬과 같은 방법으로 각각 조리한 후에 냉장고에 보관한다.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덜어 먹듯이 필요할 때 조금씩 덜어내어, 프라이팬에 밥과 함께 볶는다. 여러 가지 반찬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냉장고에 보관하면 끼니때마다 반찬을 만들지 않아서 편리하고, 실온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하여 2~3일 정도는 신선한 상태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먹다가 남은 찌꺼기 반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프라이팬에 발화점이 높은 아보카도 기름을 먼저 두른 후에, 반찬을 넣고 골고루 섞어 가면서 데운 다음 밥을 적당량 넣어 볶는다. 볶음밥은 채소가 종류별로 다양하게 들어가 컬러풀할수록 좋으며 마지막으로 먹을 때김 가루와 올리브기름을 듬뿍 넣어 마무리하면 영양 만점의준수한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이때 단백질 섭취를 위해 육류나 생선 등을 적당량 넣는 것도 잊지 말자. 이쯤 되면 아내가 외출 중이라도 언제든지 혼자서 훌륭한 만찬을 준비할 수 있다.
비빔밥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식사량을 미리 정하기 때문에 과식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찬을 테이블에 모두 차려 놓고 먹는 정식 상차림에 비해 탄수화물 섭취는 줄이면서 오히려 반찬을 더 많이 먹게 된다. 편식하지 않고 영양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비빔밥의 조리과정에서 아직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 있다. 반찬을 종류별로 미리 만들어 보관하는 번거로움을 생략하고, 아예 조리할 때 각종 천연재료와 양념을 프라이팬에 바로 투하하여 익히면서 밥을 비비면 훨씬 간편하다는 것이 나의 제안인데, 아내는 반찬 재료에 양념이 배지 않아 맛이 없다고 일축해 버린다. 요리 연구가의 말이니 토를 달 수는 없지만, 세월이 흘러 좀 더 간편 조리법을 찾다 보면 내 의견이 반영될 날이 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가 이렇게 조리한 비빔밥을 매일 아침 먹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십수 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집 비빔밥 맛에 너무 길들여 버린 나머지, 이제는 웬만한 식당의 음식으로는 우리 입맛을 충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어쩌다 외식을 하게 되면 '우리 집 비빔밥이 최고'라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을 때가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