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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로링 Jul 29. 2024

창백한 푸른 점

나의 작은 새에 기꺼이 바람을 실어 준 심규선의 음악들

 '감정이입'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풍경이나 예술 작품 따위에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불어넣거나, 대상으로부터 느낌을 직접 받아들여 대상과 자기가 서로 통한다고 느끼는 일'이다. 재미있게도 표준국어대사전은 감정이입을 철학적인 맥락의 언어로 분류하고 있는데, 우리가 예술이라는 범주에서의 산물을 보고 듣고 느끼며 교감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잦은 관념의 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 보자면, 아침에 모닝콜 음악으로 눈을 뜨고, 숙면에 도움 되는 음악을 듣다 잠들 정도로 음악이란 현대인의 필수 영양소인 것 같다. 때로는 어딜 가나 귀를 울리는 음악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때도 있다. 퇴근 후 간단히 한 잔 하러 들른 곳에서 원하지 않는 음악이 너무 크게 들리는 바람에 술과 대화는 철저히 뒷전으로 밀려난 채 맛없는 음악만 잔뜩 들이키다 온 적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일상에서 그저 기분을 내기 위한 배경으로, 또는 단순히 어떤 때에 유행하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촉매로 듣는 음악과는 철저히 다르게, 철저히 나를 사유하게 하고 나를 구원하는 음악이 있다. 이름에 '헤아릴 규'를 쓰는, 뮤지션 심규선의 음악이다. 적당선 이상으로 흠뻑 빠져 있는 무언가를 생각할 때면 으레 그렇듯이, 정말이지 어떤 계기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나는 거진 10년째 심규선의 음악에 담겨 있다.


 우릴 보고 웃는 삐에로나, 끝내 웃어야 하는 어릿광대 같은 사람 가운데 내면의 깊이가 무척이나 깊은 사람이 있다. 인간적인 성숙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나로서 기능할 때는 잘 웃고 호쾌하다가도 혼자 있을 때는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의 물살을 타고 거듭 아래로 낙하하는 모양새라고 할까. 흔한 말로는 우울이나 심연 정도로 추릴 수 있겠다.


 나 역시 마음의 지하 한가운데 감정의 못을 만들어 두고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 가난과 병마를 해진 갑옷으로 두른 채 나를 바라보는 가족과 그에 따른 책임감, 그러나 굳이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 나. 이 모든 것들이 연못의 충분한 영양분이 되었다. 이 연못을 어찌해야 하나, 멍하니 크고 깊어지고 이끼가 끼는 심연을 보고 있을 때마다 허망할 따름이었는데, 그때 연못에 내린 폭우가 심규선이다.


 

2016년, 처음 심규선의 콘서트를 다녀와서 나는 이렇게 썼다. 


루시아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감정의 홍수였다.

누가 뭐라고 하건 나는 가끔 평소에 비해 몇십 배는 섬세해지고, 또 그걸 그대로 글로 써 내려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걸 표현하면 뭇사람들은 담백하지 못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를 비롯한 누구나가 마음속에 벅찰 만큼 끓어오르고, 칼날같이 식어버리기도 하는 극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극단을 오가는 사람의 감정을 언어로 섬세하게 조각하고 멜로디를 붙여 만들어낸 루시아의 음악은 참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너무 솔직해서 내 부끄러운 몇 조각까지 모두 들켜버린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루시아의 음악에 나를 기꺼이 던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예전에 들었을 때는 과거나 현재의 경험에 빗대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같은 곡이 이번에는 또 다른 면에 덧대어지기를 원했다. 루시아의 가사와 음은 그대로인데 그걸 듣고 이해하는 내 마음은 또 달라지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들을수록 새로운' 노래들이었던 거다.


 고인 물이 범람하면 부정한 것들은 씻겨나가고 새로운 물이 차오르기 마련이다. 새 물이 차오른다고 심연에 담긴 어려운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마음으로 연못을 바라볼 수는 있게 된다. 심규선의 가사는 태풍의 눈이었다. 낱말의 폭풍 사이에서 기꺼이 명료한 곳, 그 주변은 비록 어려운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으나 그 사이에서 태풍도 고요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심규선의 음악이라고 할까. 그녀의 음악들은 '어떻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렇게 또렷하게 쓴 걸까'라는 생각을 매번 하게 한다. 그게 핵심이다. 개인적인 삶의 접점은 하나도 없는 뮤지이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헤아릴 수 있는가.


 그렇게 그녀의 음악을 벗 삼아 10년 동안 나는 용기 내 왔다. 모든 불완전한 순간에 선택할 수 있었던 동력이 됐고, 모든 고통의 종류에서 괜찮아지거나 누군가를 더욱 서글프게 사랑할 수 있었다. 심규선 콘서트 상영회의 무대인사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힘든 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라고 한 걸 보며, 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마저도 위안이 됐다.


 살면서 평생 연을 맺을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게 아니듯이, 평생을 걸쳐 힘이 될 예술을 만나는 건 천운과도 가까운 것일 테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의심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음악을 만나 매일 처음 살아보는 오늘을 살아갈 힘을 받는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이 모든 인간의 감정이 구체(球體)화된 심규선의 음악은 나에게 있어 감정이입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랫말과 선율이다. 그녀와 내가 이어져 있음을 통해 연못을 벗어나고 싶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연못 곁에 작은 오두막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말의 무거운 의미는

눈물을 참고 있는 그 얼굴을 잠시 마주 본 것만으로

네 지나온 어제가 마치 내 것처럼 가슴이 저린 것

서로를 이해한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못 참고 떨어트린 내 눈물 한 방울방울에 맺힌 긴 이야기들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보는 거야


너는 품속에 날개를 다친 작은 새를 안고 내게 와 가만히 물어보곤 해

이렇게 많이 다쳐도 다시 저 파란 하늘을 날 수 있을까요, 내 초라한 새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나에게 오는 너

내가 받아본 적 없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지

그래 우린 이렇게 서로의 안에 존재하네, 거울이 되어서 서로를 비추며

-심규선, sister

 

 심규선의 음악을 사랑한 지 한참이 지나 발매된 어떤 곡의 노랫말을 통해, 나의 연못 옆 오두막은 더욱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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