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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sunset Jun 13. 2022

당당한 무례함과 불편한 침묵에 대하여


 혼자서 미루어 짐작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고, 드러나지 않아도 알아서 헤아려야 할 것들이 있다. 오로지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할 일들의 기준에 이기와 이타가 존재한다. 그 사이 한가운데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느라 노력하는 사이, 누군가는 이기를 향해 돌진하고 누군가는 이타를 지향하며 자신을 다독인다.


 아주 멀리서 지구 상의 수많은 존재들을 바라볼 때는 그저 하하호호 행복하게 삶을 이어가는 어떤 생명체 일지 모르나, 어쩔 수 없이 곁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과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에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가 감뇌해야할 부분일 것이다.


 가끔은 수많은 의문이 뇌리를 스친다. 미처 스쳐가지 못하고 머문 의문들은 당당한 무례함과 불편한 침묵의 문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있어 머뭇거림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그 의견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혹은 타인에게 자신의 의도와 갈망을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로 인해 타인의 잔잔한 일상을 무너트리거나, 최선을 다해 얻은 기회를 위협할 때, 혼란스럽고 불편한 마음은 주로 침묵을 선택하는 사람의 쪽으로 기운다.


 그렇다면, 왜 당당하게 무례한 사람과는 차라리 말을 섞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 존재하는 것일까?  무례함의 크기를 재어 한쪽으로 과하게 기운 불편함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쪽이 무례했으니, 한쪽 역시 원치 않게 받은 무례함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다면, 결국은 침묵하던 사람 또한 무례하다는 결론이 나오고 마는 것이라 불편한 침묵이 오히려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일까?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양쪽의 균형일까, 상황의 종료일까?


 대부분의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례한 쪽은 계속 당당하고 침묵하는 쪽은 오랫동안 불편하다. 내가 침묵하는 쪽에 섰을 때 나도 사람인지라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싶어 진다. 그래서 결국 간절히 바라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그 무례함을 마음의 짐으로 가져가기를, 나의 침묵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여기기를.


 무례한 쪽이 침묵하는 쪽의 대응을 불편하게 여겨서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러워하거나 어리석은 생각으로 깨달아준다면 그때는 양 쪽의 균형이 조금은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당당한 무례함이 승리를 거둔 것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불편한 침묵이 어느 예능의 ‘당연하지’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타인의 발언에 할 말이 없어서 패배를 선택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당당한 무례함으로 무장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대의 불편한 침묵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당당함의 의미를 뻔뻔함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상대의 침묵을 패배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로 무례함을 택하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무례함이 당신의 깊은 곳에 숨겨놓은 부끄러운 민낯이며, 어리석고 뻔뻔한 생각을 결국은 모두 들켜버리고 말았다고. 침묵은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이익 앞에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 돌진하느라 무례함을 드러낸 당신을 향한 최선의 배려이니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당신은 지금 눈앞의 먹이 앞에서 침을 흘리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모습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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