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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sunset Feb 16. 2022

오늘 제주와, 책은 선물

2022. 2. 16.


 우연히 지난 여행 때 들렀던 책방의 인스타그램을 들여보다가 분점 책방이 있음을 알게 됐고 그 책방에서 서점지기 신청을 받아 몇 시간이지만 책방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젠가는 나만의 책방을 운영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한 구석에 갖고 있는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신청 링크를 열었다. 그러나, 시간의 장벽에 부딪혀 꿈은 좌절되었고, 육아를 하는 엄마인지라 오후 시간을 낼 수 없으니 혹시나 오전에 서점지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알려주십사 하고 사장님에게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어제 갑자기 연락이 와서, 혹시 예약이 취소된 날에 서점지기를 해 보겠냐고 사장님이 물으셔서 나는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책 속에 둘러싸여 일하는 행복에 대한 로망만 가지고는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일이라 익히 들어왔기에 진짜 서점을 운영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은 내려놓고 서점지기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설레어서 새벽부터 일찍 눈을 떴다. ‘책은 선물’이라는 책방의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이나 수식어를 써서 하루 동안 서점지기의 책방인 것을 알리는 작은 명패에 쓸 문구를 생각해오라고 하셨는데,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아 가면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책방은 풍차가 돌아가는 해안가의 작은 골목에 있었다. 포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따뜻한 차를 담은 텀블러를 품에 안고 책방에 들어섰다. 작고 아늑하고 정갈한 귀여운 곳이었다. 사장님께 배치된 책의 정보와 굿즈에 대한 설명을 듣고 결제 방법과 손님 응대 요령 등을 배웠다. 사장님이 떠나시고 혼자 남아 책상에 앉아 일지와 메모 등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드니 밖에 하얀 눈이 팔랑팔랑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과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골목과 돌담, 멀리 돌아가고 있는 풍차와 무심하게 툭 떨어져 있는 동백꽃 한 송이까지 이건 꿈일까 싶을 만큼 아름답고 고요했다.


 내가 제주에서,  아담하고 예쁜 책방에서 내가 직접  명패를 세워두고 하루 동안 주인이라니 꿈만 같았다. 책방 위치를 알리는 깃발에 ‘인생은 여행, 책은 선물이라 쓰인 문구를 보고 있으니 지금  공간에 머물고 있는 나의 상황이  적절하게 설명되는 듯했다. 여행하듯 사는 인생, 좋아하는 책들 덕분에 선물 받은 오늘의 호사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책이나 굿즈를 설명하면서 혹시 나의 부족한 응대 때문에 불편함이 생길까 싶어서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몇 권의 책과 책갈피, 엽서 북 등을 판매했다. 처음엔 손님이 올까 봐 잔뜩 긴장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를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틈틈이 재밌어 보이는 책 몇 권을 읽고, 좋아하는 음악도 선곡해서 재생시켰다. 스피커에서 내가 고른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무언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익숙한 음악인데 왠지 빠르게 재생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생속도를 잘못 눌렀나? 하고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클래식도, 대중가요도 전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작은 책방에서 한적한 골목과 느리게 도는 풍차를 보며 앉아있었더니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나 싶어 신기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인데, 마법 같은 일이 내게 벌어진 것 같았다.


 서점지기로써 근무시간이 끝날 때쯤 사장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선물은 어떠세요? 벌써 시간이 흘렀네요!”


 이 책방의 이름, “책은 선물”에서의 시간을 일컫는 ‘선물’이라는 말에 괜히 기분이 들떴다. 이 시간이 선물처럼 느껴졌으니, 만약 사장님의 의도가 그것이라면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여유 있게 일지를 쓰고 꼼꼼한 마무리를 하고 나오려는 계획을 세우려는 찰나, 두 명의 손님이 들어와서 꽤 오랜 시간 책을 봤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머무름을 방해하기가 미안해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다가 시간이 꽤 늦어졌다. 부랴부랴 책방 운영을 마감하고 아이들 하교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책방에 있던 시간이 정말 꿈을 꾼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나만의 책도 만들고, 책방도 운영하는 날이 올까,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오늘의 선물 같은 시간이 그 꿈을 향해가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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