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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sunset Mar 08. 2022

멈추어 있어도 인생은 흘러간다

추억의 펭귄 점프 게임 (남극 탐험)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꽃집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었다. 꽃집 바로 건너편에서는 그 친구의 아빠가 문구점을 운영하셨다. 가끔 같이 놀기로 해서 따라가면 그 아이는 내가 꽃향기를 맡건 말건 꽃집 안쪽에 가방을 던져두고 문구점으로 향하곤 했다. 우리가 그때 푹 빠졌던 남극 탐험 게임을 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꽃집 친구의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가끔 신문지에 돌돌 말린 생화를 공짜로 얻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었다. 엄마가 자주 선물로 산 꽃 달린 난 화분이 더 비쌌을지 모르지만. 꽃집 딸은 문구점 사장님을 아빠로 둔 딸의 특권을 누리기를 더 좋아했다. 그것은 원하는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는 덕분에 그 아이 옆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특권 또한 얻었다. 친구는 나도 해 보라고 동전을 주기도 했지만 왠지 미안해서 거절했다. 준비물을 사고 남은 동전이 가끔 주머니에 있을 때면 나는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 운이 좋으면 메달이라 부르던 동그란 은색 동전이 스무 개도 나오고 서른 개도 나왔다. 한 개에 백 원의 가치가 있는 그 동전으로 새로 나온 동물 모양 지우개나 작은 연필깎이 등을 사는 것이 그 시절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가위바위보 게임이 유난히 잘 안 풀리던 어느 날에 나는 처음으로 남극 탐험 게임기에 동전을 넣었다. 작은 펭귄 한 마리가 얼음 구덩이를 뛰어넘고 물고기를 먹다가 수달 같이 생긴 북극곰과 부딪히면 잡아먹혀서 죽는데 그것을 모두 지나고 나면 성처럼 생긴 남극기지에 도착하는 여정이 중독적이었다. 여차하면 구덩이에 빠지고 여차하면 북극곰과 부딪혔다. 게임을 한참 하고 나서야 남극기지에 도착한 펭귄이 얼굴을 보이며 무사히 도착했노라고 손을 흔들었다. 주머니에 동전은 다 써버렸고, 친구가 더 해보라고 넣어준 동전까지 다 썼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은 펭귄이 남극기지를 향해 가는 길 같았다. 돌멩이나 맨홀 뚜껑에 절대 닿지 않게 폴짝 뛰어넘고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미리 피하기 위해 예의 주시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를 하면서도 얼음 구덩이를 가볍게 뛰어넘는 펭귄 한 마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일은 꼭 남극기지에 도착해서 손을 흔드는 펭귄을 보고 말리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펭귄은 자꾸만 얼음 구덩이에 빠졌다. 잘 뛰어넘었나 싶으면 북극곰을 만나 잡혀먹었고 그때마다 게이머에서 관중석으로 물러난 친구는 아, 저 곰! 하고 탄식을 했다. ‘지금이야, 지금! 뛰어야 돼!’ 하고 훈수를 놓는 친구의 말을 듣다가 얼음 구덩이에 빠지면 ‘아니잖아! 타이밍을 맞춰야 된다고!’ 하고 반박하면서 어쩌다가 남극기지에 도착한 펭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면 우리도 같이 신이 나서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댔다. 뜨거웠던 여름, 오렌지색 슬러시로 목을 축여가며 뒷목이 까맣게 탄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우리는 매일 그 게임에 열정을 쏟았다.


 학교 가는 길이 유독 멀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그 게임을 생각했다. 펭귄이 뛰어가듯이, 펭귄이 남극기지에 도착하기 위해 수많은 구덩이와 북극곰을 만날 수밖에 없었듯이. 조금 지루해도 도착하면 웃을 수 있으니까.


 다가올 일들이 많아서 마음이 요동을 칠 때도 나는 그 게임을 떠올렸다. 미리 점프해 놓을 수도 없고, 미리 북극곰을 피해놓을 수도 없이 눈앞에 보여야 뛰어넘을 수 있는 일들, 다가와야만 피할 수 있는 일들이니 미리 걱정하고 계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남극탐험 게임을 빗대어 생각했다. 내가 멈추어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 타이밍 잘 맞춰 부딪히고 뛰어넘고 피하면 언젠가는 수고했다고 손 흔들며 웃는 지점이 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무엇이 다가올지 몰라도 부딪혀봐야겠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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