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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sunset Mar 21. 2022

엄마 머리에 별이 뜬 이야기

사실 엄마는…



 큰 아이가 과학 동화를 한참 읽다가 깔깔깔 배를 잡고 웃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주인공 남자아이가 얼음에서 미끄러졌는데 그 아이 머리 주변으로 별이 뜬 채 빙빙 돌고 있고 말주머니에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고 쓰인 부분이 너무 재밌어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살짝 같이 웃어주다가 문득 내 머리에 별이 빙빙 돌아다니던 웃기면서도 위험했던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올라 괜히 실룩실룩 입꼬리가 올라갔다. 엄마답게 조신한 모습으로 빨래를 개면서 말괄량이 시절의 추억을 머릿속으로만 소환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 엄마도 이렇게 머리에 별이 빙빙 돌아다니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어요? 진짜 미끄러지면 이렇게 별이 돌아다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참았던 웃음을 하하하, 하고 터트리며 엄마의 놀라운 경험담을 하나 꺼내 주기로 결심했다.


 “있지, 엄마는 머리에 별이 수십 개 떠서 열 바퀴도 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엄마가 고등학생 때.”


 “정말요? 우와, 어떻게요? 엄마도 미끄러졌어요?”


 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옆에 바짝 다가왔다.


 때는 바야흐로 여고생 시절, 치마 속에 왜 그렇게 체육복 바지를 껴 입고 다니냐고 어른들에게 매일 핀잔을 들으면서 쉬는 시간이면 말뚝박기를 하던 활기 넘치던 십 대의 어느 날, 친구들과 복도에 모여 선 자세에서 한쪽 다리를 누가 제일 높이 올릴 수 있는지 비교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의 나는 유연성이라면 자신 있었다. 허리 굽혀 손바닥으로 땅 짚기쯤은 일도 아니었고 등 뒤로 양손 잡기 같은 것은 심심하면 뽐내곤 했다. 열띈 경쟁 중에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 나는 마치 쇼미 더 머니의 가장 주목받는 배틀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시선을 끌며 가운데로 들어가 섰다. 심사위원 역할을 자처한 친구가 머리 위에 물병을 얹고 서 있었다. 그 앞 단계는 지우개, 양말 한 짝, 우유갑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물병 위에 얹어있는 작은 지우개를 날려야 최종 우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한쪽 발을 뻗어 발재간을 뽐내다가 드디어, 있는 힘껏, 오로지 물병 위에 얹어놓은 지우개를 날리기 위해 오른발을 뻗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는 바닥에 ‘큰 대’ 자 모양으로 누워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친구들 몇 명의 무리 앞에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다가 선명해졌다. 딱 그때, 내 머리 주변을 돌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도 많이 봤던 만화의 한 장면 속 그 별들, 우리 큰 아이를 깔깔 웃게 한 그 별들이 빙글빙글 한참을 내 머리 주변을 반복해서 돌아다녔다.


 “선생님, 저 죽은 거예요?”


 하고 선생님께 묻자,


 “공부를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해 봐라, 요놈아. 수업 시작했어! 얼른 들어가!”


 라고 하셨다. 내가 교실에 들어오자, 친구들이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구구단을 거꾸로 외웠다가, 엊그제 배운 원소 주기율표를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삼각함수 공식을 기억하고 있나 확인하면서 내 머리 상태를 셀프로 점검했다.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어딘가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의 충격을 입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나의 옛이야기를 듣고 아이는 너무 재밌고 신기하다고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엄마가 엄청난 말괄량이였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라 안심이 됐다. 아이가 읽는 만화 속 재밌는 친구들 중에 한 명처럼 엄마가 느껴졌는지, 다른 재밌는 추억 이야기도 해 달라고 한참 졸라댔다.


 그런데 문제는, 이야기를 들은 후 아이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자랑처럼 꺼내는 것이었다. 동생한테도, 아빠한테도, 심지어 나의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도, 엄마가 얼마나 재밌는 경험을 했는지, 만화 속에 나오는 명장면에서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도는 별을 진짜 본 사람이 우리 엄마라고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해댔다. 나는 시간을 앞으로 돌려 말괄량이 여고생의 무용담을 꺼낸 나의 입을 꿰매고 싶어 졌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옆에서 듣다 보니, 아이의 과장과 특유의 어설픈 설명이 섞여서 어찌나 재밌게 들리던지 여차하면 몇 가지 추억을 더 꺼내줄 뻔했다. 입에 맴도는 다양한 이야기와 말들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추억의 주머니 속으로 꾹 눌러 넣어두었다. 언젠가는 또 꺼내어 이야기하게 되겠지.

 

 사실 엄마는, 뱅뱅 도는 별을 본 경험이 그때뿐만은 아니라고. 부채춤 연습하다가 구령대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우산을 들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처럼 하늘을 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해 봤다가 발목을 다친 적도 있다고.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 이런 이야기들의 저 안 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괄량이 딸을 두어 한시도 마음 놓지 못하고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조심히 다니라고 잔소리하던 그 시절의 젊은 엄마가 있다. 딱 그 모습, 그 말투 그대로 이제는 손주들의 안부를 먼저 묻지만 여전히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는 우리 엄마.

 어디를 다쳐오면 무서운 얼굴로 혼내면서도 상처를 깨끗이 소독하고 약을 곱게 발라주면서 흉터라도 남지 않게  달라고 매일   모아 기도했다던 우리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같다. 덕분에 그리  흉터는 없이, 오래된 골절이나 외상 없이 이렇게 엄마가 되어  살고 있나보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이 솔직한 이야기를 해 줄까 말까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엄마 닮아 그렇다는 합리적인 설명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아들아, 사실 엄마는 말을   듣고 위험한 장난을  했던 아이였단다. 머리에 별이 뜨는 일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흔히 있는 일은 아니야. 허허허. 그래서 조심하라는 말을 더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 다쳤더니 꽤 아팠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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